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서 있는 이) 정기국회가 끝나는 9일 오후 국회 중앙홀 앞 계단에서 정기국회 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촉구를 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의 정기국회 입법이 좌초됐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를 비롯한 산업재해 유가족들은 정기국회 종료일을 사흘 앞두고 국회에서 ‘72시간 농성’까지 벌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정의당이 1호 법안으로 중대재해법을 내고 국민의힘이 처음으로 손을 잡아줬으니까 기대가 정말 컸어요. 그런데 174석이나 가진 여당은 자기들 입으로도 필요하다고, 처리하겠다고 한 법인데 약속을 왜 안 지키죠? 야당은 ‘여당에 가서 말하라’고 하고, 여당은 이낙연 대표나 박주민 의원이 ‘하겠다’고 말은 하는데 법제사법위에서 거론조차 안 되는 현실이 너무 처참해요.” 국회에서 농성 중인 김도현(30)씨가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4월 경기도 수원의 한 건설 현장 추락사고로 남동생 김태규(당시 25)씨를 잃었다.
이들의 기대에는 근거가 있었다. 산업재해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국민의힘이 지도부 차원에서 입법을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발의된 더불어민주당(박주민)·국민의힘(임이자)·정의당(강은미)의 중대재해법을 살펴보면 논의를 거쳐 접점을 찾을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처벌 수준과 대상, 적용 시기,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도입 여부 등 차이가 작지 않지만, 3당에서 나온 법안 모두 처벌의 ‘하한선’을 포함하고 있다.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보건 의무를 위반해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 박주민 안은 ‘징역 2년 이상’, 강은미 안은 ‘징역 3년 이상’, 임이자 안은 ‘징역 5년 이상’의 처벌을 가하기로 했다. 2018년 2월 고용노동부가 경영계의 반발로 ‘처벌 하한선’을 빼고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발의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지난 9월 중대재해법 ‘국민동의청원’이 시작한 지 한달 만에 10만명 동의 요건을 채워 국회에 제출되는 등 공감대가 넓어진 덕분이다.
시민들의 열망이 모아졌지만 국회 논의는 절대적으로 적었다. 21대 국회가 중대재해법을 회의 안건으로 올려 논의한 시간은 총 2시간이 채 안 된다. 지난달 26일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끼리 모여 단 15분 논의했고, 지난 2일 열린 법사위 공청회도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1시간36분 진행됐다. 그동안 민주당은 제정법의 특성상 공청회 등을 거쳐야 해서 정기국회 처리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는데, 공청회가 열린 지난 2일 뒤에도 중대재해법은 법안소위 안건에 단 한 차례도 오르지 못했다.
정기국회 내내 여야의 말잔치는 실로 화려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9월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해마다 2천명의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희생되는 불행을 막아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그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달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중대재해법 논의를 위해 손을 잡았을 때는 ‘입법으로 가는 지름길’에 오른 듯 보였다. 국민의힘은 지난달 10일 ‘중대재해 방지를 위한 정책간담회’를 열고 중대재해법을 1호 당론으로 발의한 정의당 강은미 의원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산업재해를 방지하자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각 당 입장을 떠나서 전폭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정의당의 중대재해법에 공감을 표했다. 주호영 원내대표 역시 “(오늘 간담회는) 국민의힘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해 달라”며 초당적 협력을 다짐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정작 법사위에서 중대재해법 논의를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아 ‘중도층 공략’을 위해 중대재해법을 이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국민의힘이 ‘변칙수’를 두며 정의당과 연대하는 동안 민주당은 좌고우면을 거듭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공개적으로 중대재해법 제정을 거듭 약속했지만, 당내에서는 김태년 원내대표와 한정애 정책위의장을 중심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쪽에 힘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한 민주당 의원은 “원래 우리 당 정책위는 국민의힘이 중대재해법을 절대로 못 받는다고 보고 현실 가능한 안으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검토했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정의당과 손을 잡아 치고 들어오면서 한 방 얻어맞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산업안전보건법만 개정하려던 입장에서 중대재해법 제정까지 동시 추진하는 쪽으로 선회했지만, 사실상 당내 이견을 방치하고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당 차원에서 내세우는 법안은 보통 정책위가 조율해서 법의 명확성이나 정교성을 높여줘야 하는데 한 의장이 중대재해법 제정에 소극적이다 보니 답답한 상황”이라며 “당내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정리하는 조율의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동안 산업재해 유족들은 중대재해법 제정에 힘을 쓸 수 있는 정치인이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찾아가 만났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정치권의 안일함뿐이었다. “어느 여당 의원은 이천 화재처럼 38명쯤 죽어야 중대재해지 1명씩 죽는 건 중대재해가 아니라고 ‘반대는 안 하겠다’고 해요. 그건 찬성한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국민의힘은 우리더러 여당이 공수처법 하는 거 막아주면 중대재해법 하겠대요.” ‘태규 누나’ 김도현씨가 말했다.
지난 8일 국회 각 상임위에서는 여당 주도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개정안 등 각종 쟁점법안이 통과됐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상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 집행위원장은 “검찰개혁도 중요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지키자는 중대재해법 논의가 그에 밀리고 있는 양상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여야가 말로는 다 좋다고 하니까 당연히 처리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왜 통과가 안 되는 건지 참 궁금한 상황”이라며 “우선 임시국회까지 최선을 다해 의원들에게 호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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