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이 이번 임시국회에서도 무산될 전망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핵심협약에 맞춘 노동관계법 개정을 마쳤지만, 정작 ‘비준’을 해야 하는 외교통일위원회가 손 놓고 있는 탓이다. 노동관계법 개정 과정에서도 각종 독소조항을 둘러싸고 갈등이 컸는데 ‘산 넘어 산’이다.
국제노동기구는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해 190개가 넘는 협약을 만들고 이를 비준한 회원국의 준수 상태를 관리하고 있다. 이 협약 중 8개를 ‘핵심협약’으로 지정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한국이 아직 비준하지 않은 협약은 ‘결사의 자유’(87·98호)와 ‘강제노동 금지’(29·105호)로 총 4개다. 187개 회원국의 80%가 8개 핵심협약 전부를 비준한 상태다. 한국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비준을 약속해왔지만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전에 노동 이슈를 담당하며 국제노동기구 협약 비준 문제를 줄창 써왔던 취재기자가 답답한 마음에 이 해묵은 문제가 왜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따져봤다.
■ 무역 분쟁 앞두고도 ‘핵심협약’ 미루는 국회
국회 외통위가 핵심협약 비준을 논의한 것은 지난 정기국회 중이었던 지난해 11월30일 법안심사 소위가 마지막이었다. 당시 회의록을 살펴보면 외통위는 핵심협약 비준이 시급한 과제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25년동안 미뤄진 한국의 핵심협약 비준이 외교 문제와 무역 분쟁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는 탓이다.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유럽연합(EU)이 한국의 핵심협약 미비준을 문제 삼아 지난 2019년 공식적인 ‘무역분쟁 해결 절차’를 개시했다. 핵심협약을 체결하고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로 한 자유무역협정 규정을 한국 정부가 어겼다는 주장이다. 유럽연합의 주장을 살펴보기 위한 전문가 패널이 소집된 상황에 ‘비준 연기’는 분쟁 해결 절차에서 한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이 핵심협약 비준안을 정기국회 내에 외통위 소위에서 일단 통과시키자고 주장한 이유다. 한국이 비준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유럽연합 쪽에 빌미를 주지 말고 ‘소위원회 통과’를 통해 ‘시그널’을 전달하자는 것이다.
◯ 이재정 민주당 의원
외통위로서는 이 논의를 시급하게 하지 않으면, 비준동의안을 법안소위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하면 직무유기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럽연합이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관련한 ‘비준 노력 미이행’을 이유로 여러 가지 문제 제기를 한 상황에서 외통위 본연의 의무는 최소한 법안소위 절차에서는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켜 놓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물리는, 저는 되게 궁색한 상황이지 않나라는 생각합니다.
(…)
◯ 윤건영 민주당 의원
정부 입법안의 세부 내용은 환노위에서 처리하도록 하고 우리는 거기에 보조를 맞춰 나가는 게 맞는데 그 선이 어디까지냐는 것 같아요. 그 선이 저는 법안소위 부분은 처리를 해 두는 게 유럽연합에 대한 시그널도 되고, 또 노사가 지금 갈등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가 법안소위 정도 했다고 해서 이게 자극적이냐?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2020년 11월30일 외교통일소위원회 중에서
하지만 이날 국민의힘은 환노위 논의가 끝난 뒤 외통위 논의가 시작되는 것이 바른 순서라며 의결에 반대하고 나섰다.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선결과제’인 노동관계법 개정이 끝나야 본격적으로 비준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외통위원들은 ‘비준 여부’를 넘어서 노동관계법 개정 내용에까지 딴지를 걸었다. 당연히 경영계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했다.
◯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
전문성 있는 상임위원회(환노위)에서 논의를 하도록 하고 그게 맞추어서 우리도 같이 동시에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현재 노동관계법(개정안)에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 위반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조 전임 인력에 대해서. 사용자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이익 제공에서 위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국제노동기구 협약에 완전히 들어가겠다면 그런 조항들도 다 걷어 내야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
만약에 노사 서로 간에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다면 저는 법안소위에서도 이것을 반대할 입장입니다. 여기서 찬성을 미리 해 놓으면 나중에 비준동의안을 반대할 수가 없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지요.
―2020년 11월30일 외교통일소위원회 중에서
문제는 국민의힘의 딴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이 “협약 위반”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 삭제’를 말한다. 기존 노동조합법은 사용자가 노동조합 전임자에게 급여를 주는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로 규정해 금지하고 있었는데 지난 정기국회에서 이 조항이 삭제됐다.
재계는 이런 법 개정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협약’ 2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한국에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이 도입된 1997년 3월부터 국제노동기구는 지속적으로 “전임자임금 지급 여부는 법으로 정할 것이 아니라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며 권고해왔다. 도리어 이 권고를 무시해온 것은 한국 정부와 국회였다.
■ 환노위 먼저 지켜보자던 외통위 ‘개점휴업’
이날 똑같은 논리로 평행선을 달리던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잠시 회의를 멈췄다. 여야는 15분간 비공개 논의를 거친 뒤 돌아와 심사 유보를 결정했다. 앞서 윤건영 민주당 의원이 “내일 통일부 관련 법안소위가 잡혀 있고 그다음에는 조금 기약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까지 말했지만, 외통위는 구체적인 논의 계획도 세우지 않고 핵심협약 비준안을 뒤로 미뤄둔 셈이다.
◯ 김영호 민주당 의원 /소위원장
지금 회의를 시작한 지 한 2시간 40분 됐거든요. 잠시 중지하고, 이 관련된 내용을 비공개로 조금 얘기를 해서 최대한 여야의 정치력을 발휘해서 이것을 한번 위원장실에서 추가 논의 좀 해 보겠습니다. 10분만 중지해도 될까요? (“예” 하는 위원 있음) 잠시 중지하겠습니다.
(15분 뒤)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관련된 법안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는데 약간의 이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제노동기구(ILO) 관련된 법안은 추후에 다시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것으로 하고요. 방금 전에 비공식적으로 위원님들과 의견을 나눴는데요. 환노위에서도 같은 법안을 심사하시는데 그 심사 결과를 보고 외교통일위원회에서도 관련된 법안을 지속적으로 심사하도록 하겠습니다.
환노위는 지난 정기국회 막판에 집중 논의를 거쳐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을 마무리했다. “환노위 논의를 지켜보자”며 미룬 외통위는 과연 12월 임시국회에서 핵심협약 비준안 심사를 이어 갔을까?
외통위는 이번 임시국회 내내 ‘개점휴업’ 상태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외통위는 정기국회가 마무리된 뒤 단 한 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 최근 이란 혁명수비대에 한국 유조선이 억류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지난 6일 긴급 간담회를 연 것이 활동의 전부다.
지난해 12월 민주당이 외통위에서 대북전단금지법을 단독 처리한 뒤 외통위가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 민주당 쪽 설명이다. 외통위 소속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한겨레>에 “환노위에서 관련 법이 다 통과된 상황이라 외통위는 형식적으로 비준 처리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면서도 “대북전단금지법 처리된 뒤부터 야당이 의사일정 합의를 해주지 않아 멈춰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오는 2월 국회에서 핵심협약 비준 절차에 들어가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그동안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야당이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원내대표 간에 만나 합의를 이루기도 하고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며 “오는 2월 국회에서는 의제에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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