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정치부에서 청와대를 담당하는 석진환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꾸벅.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린 지난 6일 저는 기자회견장 맨 앞줄에 있었습니다. 질문은 못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사내 동료, 과거 취재원들, 심지어 언론비평 매체들은 질문하지 못한 저한테 물었습니다.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 정부에 비판적인 매체들은 왜 질문자에서 제외됐는가?” “질문지가 왜 사전에 청와대에 넘어갔는가?”
결과적으로 그날 전 독자들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불친절한 기자’였습니다.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밋밋한 질문으로 ‘기자들이 들러리 선 게 아니냐’는 질책은 청와대 기자단의 일원으로서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변명이나 핑계로 비치겠지만, 늦게나마 기자들의 회견 준비 과정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청와대 춘추관에 등록된 취재기자(사진·영상 취재기자 제외)는 150명 안팎입니다. 매체별 특성에 따라 종합일간지·방송·통신·지역언론·경제지·인터넷매체·종편 등으로 나뉘어 각각 간사를 두고, 주요 사안이 있으면 간사단이 모인 회의에서 주요 결정을 합니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청와대에서는 회견 시간을 80분 정도로 잡고 12명에게 질문을 받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이 60분 남짓에, 질문 8개였음을 고려하면 형식적으로는 적은 분량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언론 매체가 많이 늘어서 질문자를 나누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간사단 회의 끝에 종합일간지 2명, 방송 2명, 지역언론 2명, 통신사 1명, 경제지 1명, 인터넷매체 1명, 종편 1명, 그리고 내·외신 기자회견이라는 점을 고려해 외신 2명에게 질문권이 주어졌습니다. 외신을 제외한 각 매체의 간사들이 질문할 내용이 겹치지 않도록 상의해 10개의 질문 분야를 선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종합일간지에서는 ‘국정원 사태’와 ‘노사관계 등 노동문제’를 묻기로 했고, 방송은 남북관계를 집중적으로 묻기로 역할분담을 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매체별 질문자 수 배정이나 질문 순서 등을 놓고 약간의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매체별로 나눈 질문을 어느 언론사 기자가 할 것인지 정하는 일도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속한 종합일간지 기자는 모두 11명입니다. 기자들 중에선 보수매체인 <조선> <중앙> <동아>에서 1명, 그리고 진보매체인 <한겨레>나 <경향>에서 1명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는 5곳을 제외한 다른 매체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어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방안이었습니다. 결국 ‘추첨’으로 질문자를 정했습니다.
구체적인 질문 내용은 질문자의 권한이어서, 질문자가 직접 문안을 작성해 개별적으로 청와대에 전달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 대통령 기자회견 때도 청와대 기자단은 미리 질문 순서와 내용을 조율해왔습니다.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자칫 엉뚱한 질문이 나오면 핵심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들을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질문자 12명의 질문안이 최종 취합된 시점은 5일 저녁입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분주한 시간을 보냈겠지요.
사전에 조율된 주제라 하더라도, 좀더 공격적인 질문으로 어떻게든 대통령의 솔직한 의중을 끌어내는 것은 기자들의 몫입니다. 이번에도 질문지에는 없는 내용을 살짝 집어넣어 기삿거리를 뽑아내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모호한 내용으로 애초 질문 취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기자단 내부적으로 추가적인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 직후 기자실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한 기자가 기자회견 형식과 관련해 대통령에게 “다음번엔 토론 형식으로 하시죠”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지난해 언론사 편집국장단, 논설실장단, 정치부장단을 각각 초청해 3번의 간담회를 한 사례를 꺼내들었습니다. 당시엔 사전 조율 없이 자유로운 문답을 했고, 대화 내용도 모두 언론에 공개됐습니다. “그게 토론 형식 아니냐”는 게 박 대통령의 말이었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자리를 자주 마련해 더 자유로운 문답이 오갔으면 합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생생한 육성을 들으면 더 좋겠지요. 백악관 최고참 여기자로서 수많은 미국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했다는 고 헬렌 토머스 기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될 수도 있다.”
석진환 정치부 정당팀 기자 soulfat@hani.co.kr
석진환 정치부 정당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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