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청와대 “구두보고” 해명과 달리
조응천 “작성 뒤 문서로 전달”
김 실장, 조처 없이 사태 키워
속사정 있었나 의혹 커져
조응천 “작성 뒤 문서로 전달”
김 실장, 조처 없이 사태 키워
속사정 있었나 의혹 커져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정윤회씨 국정개입 동향 보고’ 문건은 애초 청와대의 설명과 달리 최초 작성된 뒤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문서로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된 문건들이 대량 유출된 뒤인 지난 6월,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내부 문건 유출 사실과 함께 A4 용지 100장 분량의 문건 사본을 이른바 ‘3인방’ 중 한 명인 정호성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게 전달했으나, 이후 청와대에서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9일 조 전 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전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등의 검찰 진술 내용과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실 근무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조 전 비서관은 검찰에서 “정윤회씨 국정개입 보고서 작성은 ‘김기춘 실장 경질설’을 조사하다 나온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 비서관은 ‘당시 언론에 김기춘 비서실장 경질설 등의 보도가 자주 나와서 위에서 알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지시자가 김 실장인지 홍경식 민정수석인지 정확한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지시를 받고 당시 박관천 행정관에게 조사를 맡겼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조 전 비서관의 지시를 받은 박 전 행정관은 박아무개(61)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등이 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김기춘 실장 경질설’이 정윤회씨와 이른바 ‘십상시 모임’ 등에서 비롯됐다는 보고를 했다. 국세청 세원정보과장을 지낸 박 전 청장은 정보업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했다고 한다. 몇 차례 다듬어진 보고서는 홍경식 수석에게 보고됐다. 이와 관련해 조 전 비서관은 검찰에서 “홍 수석이 ‘김 실장과 관련된 얘기이니 직접 보고하라’고 해 김 실장에게 보고하고, 보고서도 직접 전달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이는 처음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이 공개됐을 때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비서실장은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만 보고받았다”고 해명한 내용과는 다르다. 만약 조 전 비서관 주장대로 김 실장이 문서 형태로 보고를 받았다면 이번 사태에 대한 김 실장의 책임론은 더 커질 수 있다. 문서로 보고를 받고도 김 실장은 별다른 후속 조처를 하지 않은 셈이고, 석연찮은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 내용을 전달하지 않은 채 사태의 심각성을 키운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검찰이 김 실장을 상대로 실제로 이 문서를 전달받았는지 여부와 사후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등에 대해 조사할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김 실장이 문건을 보고받은 이후 문서 작성자인 박 행정관은 청와대를 떠나게 됐고, 3월 초 청와대 행정관들의 비위를 조사한 공직기강비서관실 감찰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뒤에는 공직기강비서관실에 대한 특별감찰도 실시됐다. 조 비서관도 4월 중순 경질을 통보받았다.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실 근무자들은 최근 <한겨레>에 “3월 이후 청와대 내부 문서가 대량으로 유출됐다는 게 파악된 뒤, 청와대를 떠난 조 전 비서관이 <세계일보>로 흘러간 문서 일부를 구했고, 이 문서들을 ‘유출 관련 보고서’에 첨부해 정호성 비서관에게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또 “보고서는 ‘유출본 회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첨부한 유출 문서는 A4 100장 안팎 분량이었다”고 덧붙였다. 일부 언론은 최근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이지(EG) 회장이 정 비서관에게 유출된 문건들을 전달했다고 보도했고, 이에 정 비서관은 “박 회장으로부터 어떤 것도 전달받은 적이 없고, 박 회장과 접촉한 적도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이는 정 비서관에게 유출 문건을 전달한 사람이 박 회장이 아니라 조 전 비서관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어쨌든 당시 정 비서관 등 청와대에선 ‘문건 내용이 신빙성이 없고, 유출 경로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조 전 비서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정 비서관 등 문건을 전달받았던 청와대는 얼마 뒤 이를 다시 조 전 비서관 쪽에 되돌려줬다. 청와대 내부적으로는 조 전 비서관이나 박지만 회장 쪽이 3인방을 포함해 청와대 측근 참모들을 흔들려는 의도로 문건을 활용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조 전 비서관의 부탁으로 정 비서관한테 문건을 전달했던 행정관은 대기발령을 받았고, 이후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했던 행정관 10여명도 일제히 교체됐다.
■ 학연·지연으로 얽힌 인맥들 현재 검찰은 조 전 비서관과 김기춘 실장, 정호성 비서관 등 청와대 내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선 접근하지 못한 채 구체적으로 문건이 누구의 제보로 작성되고, 이 문건이 어떤 경로로 유출됐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검찰 조사 내용을 보면, 특히 문건의 최초 작성 과정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끼리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과거 정부에서도 숨은 권력의 은밀한 국정개입이나, 권력 내부의 물밑 암투 등이 통상 학연과 지연 등 사적 인맥으로 얽혀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 경정과 문건 내용을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박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또 박 전 청장에게 이른바 ‘십상시 모임’ 내용을 알려준 인물로 지목된 김춘식(43) 대통령국정기획비서관실 행정관 등 3명이 모두 동국대 동문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김 행정관은 박 전 청장과 지난해 동국대 동문 지인의 소개로 만나 알게 됐고, 박 경정은 박 전 청장과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녔다. 박 경정은 검찰 조사에서 “박 전 청장이 비밀회동설을 내게 알려주면서 김 행정관으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박 전 청장과 박 경정은 학연 외에 같은 티케이(TK·대구경북) 출신으로, 경북 경산 출신인 박 전 청장은 경산중학교를 나온 박 경정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보고서 밑그림을 던져준 것으로 지목받은 박 전 청장은 같은 경산 출신이자 ‘3인방’ 중 한 명인 안봉근(48) 청와대 제2부속비서관과 친분이 두텁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 전 청장은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 조사 결과 그가 안 비서관과 자주 교류해온 사실이 드러나면 ‘국정개입 동향 보고’ 문건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정윤회씨 국정개입’ 문건을 처음 보도한 <세계일보>는 이날 ‘안 비서관이 박 전 청장에게 정윤회씨와 그를 따르는 비선 모임의 동향에 대해서도 일부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문건 출처가 안 비서관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안 비서관은 이날 “정부 출범 뒤 박 전 청장과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다”고 부인했으며, 청와대 안팎에서도 안 비서관이 박 전 청장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많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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