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26일 정부 차원에서 내년에 임신중절(낙태) 관련 실태조사를 8년 만에 벌이기로 한 것은 그만큼 임신중절 합법화 관련 논란이 뜨겁기 때문이다. 입법권이 없는 청와대는 일단 실태조사를 기반으로 낙태죄 폐지에 관한 여론을 수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낙태죄’는 ‘임신한 부녀가 약물을 이용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스스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269조1항을 말한다.
조국 민정수석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하는 제로섬으로는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다. 둘 다 우리 사회가 지켜가야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신중한 접근’을 강조했다. 하지만 조 수석이 언급한 자료와 사례를 들여다보면 청와대의 의중이 낙태죄 폐지나 대폭 완화 쪽에 기울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 수석은 “이 문제를 논의하려면 임신중절이 얼마나 이뤄지고, 원인은 뭔지 먼저 살펴봐야한다”면서 2010년 정부 조사 자료를 언급했다. 이 조사를 보면 추정 낙태 건수는 연간 16만9000여건이지만 합법적인 임신중절 시술 건수는 1만8000여건으로 6%에 불과하다. 불법 임신중절로 인한 기소 건수는 연간 10여건에 그친다. 조 수석은 35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국가가 29개국으로 전체의 80%에 이른다는 통계도 제시했다.
아울러 그는 △교제한 남성과 최종적으로 헤어진 뒤 임신을 발견한 경우 △별거 또는 이혼 소송 상태에서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발견한 경우 △실직·투병 등 경제적 어려움 탓에 아이 양육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임신을 발견했을 경우를 꼽으며 “현재 이 세가지 경우에도 임신중절을 하면 범죄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임신중절에 대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만큼 이번 청원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새로운 균형점을 찾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5년마다 낙태 실태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2015년에는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못했다”며 “내년에는 2억원의 실태 조사 계획안이 정부 예산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원칙적으로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근친상간, 성폭행,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경우 등에 한해서만 임신중절을 허용한다. 헌법재판소는 2012년 “태아는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며 재판관 4 대 4의 의견으로 형법의 낙태죄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에는 지난 2월 이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이 다시 제기된 상태다. 5년 전과 견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합헌 결정때 심리에 참여했던 재판관 8명은 모두 임기가 끝났다. 27일 취임하는 이진성 헌재소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임신 뒤) 일정 기간 내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김이수 재판관도 “예외적으로 임신 초기 단계고 원하지 않는 임신의 경우와 같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우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며 낙태죄 규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고, 강일원·안창호·김창종 재판관도 “태아의 생명 보호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조화돼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은 적이 있다.
성연철 김민경 김양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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