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18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미국 워싱턴에서 지난달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세계의 이목을 단번에 잡아 끈 장면이 있었다. 본격 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전쟁 영웅인 랠프 퍼킷 주니어 미 예비역 육군 대령에게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한 뒤 나란히 한쪽 무릎을 꿇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중국에 대한 ‘거리두기’를 둘러싸고 삐걱거리는 듯 보였던 한-미 동맹의 강고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이 지닌 독특한 외교 자산인 ‘보훈 외교’의 가능성을 일깨운 순간이었다.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아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에게서 보훈 외교의 중요성과 한국 보훈정책에 대한 계획을 들었다.
―지난달 21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두 정상이 고령인 미국의 전쟁 영웅을 가운데 모시고 사진을 찍었다. 두 정상이 나란히 무릎을 꿇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놀랐을 거라 생각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감명을 받았다. 한-미 동맹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었다. 보훈은 과거에 대한 것이지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보훈 외교는 지난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에 와 우리를 도와준 분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우리가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에 대해 우리가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고마움은 정으로 연결된다. 일반 외교의 차원을 넘어 70년 동안 쌓인 정을 바탕으로 관계유지를 위해 노력해왔다. 2002년 월드컵도 기억해보기 바란다. 3~4위전 상대였던 터키가 우리보고 ‘형제의 나라’라고 한다. 이는 경기 한번 한다고 생기는 관계가 아니다. 피를 나눈 혈맹이고, 이 관계를 소중히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보훈 외교라는 것은 세계 어떤 나라도 가지기 어려운 훌륭한 외교 자산이다. 또 국가 사이에 관계가 좀 불편한 게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문 대통령은 회담 이후 워싱턴에 만들어진 ‘추모의 벽’ 건립식에도 참석했는데.
“회담 직후인 21일 오후 워싱턴 디시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미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을 열었다. 높이 1m, 길이 50m의 벽에 미군 3만6595명, 그들과 함께 싸운 한국군 카투사 7174명의 이름을 새기게 된다. 추모의 벽 건립 예산(약 274억원)은 정부 지원과 성금으로 충당했다. 존 틸럴리 한국전참전용사기념재단 이사장(전 주한미군사령관)이 ‘외국 군인의 이름이 (미국 군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념비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위치도 워싱턴의 매우 좋은 곳에 있어 외국 관광객은 물론이고 미국 사람들도 많이 볼 것이다. 틸럴리 이사장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간 한국에 근무하며 △동해 간첩 침투 사건 △제1연평해전 등 안보적으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도 국민의 정부가 주도한 금강산 관광사업을 지원했다. 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귀국길에는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전투부대를 파병했던 콜롬비아에 들렀는데.
“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을 만났다. 콜롬비아는 남미 유일의 참전국이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해 자신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있다는 점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전쟁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차원에서 협력의 폭을 넓혀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2014년 해군참모총장 때 1000t급 초계함인 안양함을 양도한 적이 있다. 예전에 우리를 도와줬다는 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배를 보내줬다. 앞으로 20~30년은 계속 써도 문제 없게 깔끔하게 리모델링을 해서 넘겨드렸다. 현재 한국전쟁 등으로 부상을 입은 분들을 위해 의수·의족 등을 개발 중이다. 이런 보철구들도 계속 지원할 생각이다. 또 태권도 교관 지원, 체육관 건립, 태권도 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 등도 지원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 때 콜롬비아 한인회에서 만든 ‘한-콜 우호회관’도 들렀다. 그러다 참전용사분 집에 갔는데 ‘그때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다른 기억은 아무것도 없고, 너무 추웠다. 정말 추운 게 힘들었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짠했다. 마지막으로 두케 대통령이 방탄소년단(BTS)이 꼭 한번 와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다. 현지의 한류 열기가 대단했다.”
―보훈 행정으로 얘기를 돌려보자. 문재인 정부 들어 독립운동가 서훈 기준이 바뀌었는데.
“여성 독립운동가 서훈을 위해 노력했다. 그동안엔 서훈이 되려면 공식적인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시대적 한계상 여성 독립운동가의 경우 이런 자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기나 일기 등도 근거자료가 될 수 있게 심사 기준을 바꿨다. 그 결과 2018년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 227명이 새로 서훈됐다. 지금껏 서훈된 여성 독립운동가(526명) 중 44%가 2018년 이후 새로 발굴한 분들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보상금·보훈수당체계는 어떤가?
“독립운동가 자녀와 손자녀를 대상으로 한 생활지원금을 신설했고, 참전명예수당은 55%(34만원), 4·19혁명공로자 수당(35만1000원), 전상수당(9만원) 등도 크게 올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훈 대상자들이 보상금이나 보훈수당을 받으면 일부의 경우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선정 과정에서 이 돈이 수입으로 계산돼 생계급여가 줄어들거나 수급 대상에서 탈락한다. 그렇게 되면 이분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부분이 많이 희석된다. 또하나 문제는 참전유공자 문제다. 이분들이 돌아가셔도 부인분들이 남는다. 부인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참전명예수당을 100%까지는 아니어도 50~60%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훈 복지는 일반 복지보다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한다.”
―국가유공자들에게 명패 달아드리는 사업은 잘 추진되고 있는지.
“이 사업은 통일된 명패를 달아드리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2019년 시작됐다. 독립유공자 유족, 전상군경, 참전유공자 등 국가유공자 35만명에게 명패를 달았고, 올해부터는 전몰, 순직군경 등 유족으로 범위를 확대해 총 57만명에게 달아드릴 예정이다.”
―국립묘지 안장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죄상이 분명한 사람들은 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데.
“그런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안다. 친일반민족행위가 분명한 분들을 이장하는 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6·25 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선친일, 후호국’인 분들이 문제가 된다. 일단 국립묘지에 안장이 됐다는 것은 후호국 부분의 공적이 인정되었다는 뜻이다. 참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 측면만 볼 수가 없다. 현재 정치권에서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그밖에 국립묘지의 안장 능력을 확충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5월 말 기준으로 생존해 계신 안장 대상자는 39만여명이지만, 현재 여력은 7만8천기에 그쳐 부족하다. 연천·제주 등에 국립묘지를 조성 중이고 기존 호국원을 확충해 2030년까지 21만기 안장 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국가보훈처는 전임 박근혜 정권 때 5·18 기념식을 둘러싸고 큰 사회적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이 논란이 됐는데.
“지역에서 운동할 때 지역민들이 불렀던 노래를 존중해야 한다. 당시 지역에서 애국적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부른 애국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노래로 표출이 되고, 우리는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17년 행사부터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식순에 넣어 제창했다. 이 노래를 통해 전 국민들이 광주의 아픔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문재인 정부 들어 6·10 만세운동, 2·28 민주운동(대구), 3·8 민주의거(대전) 등을 새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로써 민주화 운동 관련 국가기념일이 3·15 의거(마산),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등 5개로 늘었다. 이들 기념일 중에는 지역이 중심이 되는 행사도 있다. 이런 행사는 정부가 주관은 하지만, 앞으로는 지역이 주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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