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중 마지막 유엔 연설에서 거듭 ‘종전선언’을 한반도 평화의 문을 열 열쇳말로 제시했다. 끝까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다만, 미-중 대결 국면이 이어지고, 남북 관계 역시 얼어붙은 탓에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문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각)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76차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해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주실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며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는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한국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종전선언’을 이뤄낼 때, 비핵화의 불가역적 진전과 함께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남·북·미·중은 한국전쟁 당사국이고 북·미·중은 정전협정 서명국이다.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직접 거론·제안한 것은 이번을 포함해 세번째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첫 정상회담(4·27 판문점 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비핵화를 위한 과감한 조치들이 관련국들 사이에 실행되고 종전선언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고, 지난해 9월 온라인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불가역적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의 마중물’로 ‘종전선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문 대통령의 지론이다.
하지만 임기 중 ‘종전선언’이 실현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 남북은 물론 북-미 관계는 2019년 2월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장기 교착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그럼에도 ‘종전선언’이란 화두를 다시 꺼내 든 까닭을 다각도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문 대통령은 내년 3월9일 대통령 선거까지 다섯달 남짓 남았지만 마지막까지 정상외교를 핵심으로 한 톱다운 방식의 정세 돌파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북·미·중 3국과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완전한 평화”로 나아갈 징검돌로 ‘종전선언’의 중요성을 각인하려는 전략적 의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은 한반도에서부터 항구적이고 완전한 평화가 확고히 뿌리내리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문 대통령이 이번에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라고 종전선언의 주체를 새삼스레 명시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액면만 보자면, 이는 2018년 4·27 판문점선언 3조 3항의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의 재확인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2018년과 2020년 유엔총회 연설 때는 종전선언 주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2018년 3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2018·2019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2019년 6월30일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등 최근 몇년 새 한반도 정세의 거대한 전환이 ‘남북미 3자’를 중심으로 이뤄진 탓에, 문재인 정부는 ‘3자’보다 ‘4자’ 종전선언에 힘을 실어왔다. 문 대통령이 이번에 “남북미중 4자”에 의한 ‘종전선언’ 방식을 다시 소환한 건, 중국의 구실을 기대한다는 외교적 신호로 읽을 여지가 있다.
대놓고 강조하진 않았으나, ‘중국의 적극적 구실’과 한-중 협력 노력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 한반도 정세 돌파의 새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 조정’을 염두에 둔 언급일 수 있다. 평창겨울올림픽이 2018년 정상외교의 무대를 열었듯이, 내년 2월 베이징겨울올림픽이 새로운 무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남북 정상이 4·27 판문점선언에서 합의하고 북·미 정상이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4·27) 판문점선언 재확인”을 확약했음에도 ‘종전선언’이 실현되지 않는 까닭은 근본적으론 북-미 간 불신 증폭과 미국의 소극적 태도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종전선언’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사실이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각)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란의 핵합의 복귀를 촉구하면서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기 위해 진지하고 지속적인 외교를 모색한다”며 “한반도와 역내 안정을 증진하고 북한 주민의 삶을 개선할 실질적 약속과 함께 가능한 계획을 향한 구체적인 진전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어떤 종류의 ‘종전선언’도 패권전략의 핵심 군사수단인 주한미군 주둔 명분을 훼손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종전선언’ 추진에 적극적이지 않다.
북한 쪽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종전선언’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4·27 판문점선언이 웅변하듯 종전선언에 대한 북한의 태도는 우호적이다. “종전선언은 조선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의 첫 공정”(2018년 9월4일 외무성 군축 및 평화연구소장)이라는 것이다.
결국 관건은 미국의 태도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22일 “북한의 반응이 핵심”이라고 했지만 외교안보 분야 원로는 “종전선언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이제훈 선임기자,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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