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10월 미국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SSBN) 헨리 M 잭슨함이 하와이 인근에서 보급품을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다. 미 해군 누리집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각) 발표한 워싱턴 선언에서 “미국은 향후 예정된 미국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을 통해 증명되듯, 한국에 대한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한층 증진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케네스 월스바흐 미 태평양 공군사령관은 지난달 29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폭격기가 정기적으로 한반도와 주변에서 활동하고 아마 한반도에 착륙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 전략폭격기는 한반도 상공으로 날아와 착륙하지 않은 채 훈련만 하고 돌아갔다.
바다 깊이 숨어 작전하는 전략핵잠수함이 물 위로 부상해 항구에 들어오고, 공중에서 작전을 펼치는 전략폭격기가 땅에 내려오는 것은 이례적 상황이다.
이를 두고 정부는 미국 확장억제의 실행력과 신뢰가 높아진 구체적인 증표라고 설명한다. 군 관계자는 3일 “억제하려면 보여주고, 승리하려면 숨겨야 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 전쟁에서 이기려면 전략핵잠수함, 전략폭격기가 숨어 은밀하게 임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지금같은 위기관리 단계에선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미 전략핵잠수함 한국 기항과 미 전략폭격기 한국 착륙은 북핵, 미사일 위협이 높아지면서 국민적 불안이 가중되고 국내에서 독자 핵무장 주장이 나오자, 이를 달래고 잠재우려는 한국과 미국의 ‘고육책’이다. 이런 조처들은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의미가 없다.
핵무기 운반 수단으로는 잠수함, 전략폭격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있다. 지상에서 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위치가 드러나기 쉽기 때문에, 유사시 적의 공격에 노출돼 생존성이 낮다. 이에 견줘 잠수함과 전략폭격기는 하늘과 바다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은밀성, 기습성이 높고 유사시 최후까지 살아남아 적에게 보복공격을 할 수 있다.
대표적 미 전략핵잠수함으로 꼽히는 오하이오급 잠수함 한 척이 지닌 파괴력은 2차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1600발과 맞먹는다. 오하이오급에 탑재된 트라이던트Ⅱ 에스엘비엠(SLBM)은 최대 사거리가 12000㎞이기 때문에 표적 가까이 가지 않고 먼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형태로 임무를 수행한다. 한반도 근처 바다까지 오지 않아도 하와이나 괌에서 북한을 타격할 수 있다. 트라이던트 미사일은 아이시비엠급 사거리를 갖고 있어서 목표물과 최소 2500km 정도 떨어져 있어야 운용 가능하다고 한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이 잠수함이 언제, 어디서 공격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공포감이 극대화돼 함부로 핵무기 발사 단추를 누르지 못한다. 전략핵잠수함이 대북 억제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려면 바다 속 깊이 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략핵잠수함이 물 위로 부상해 항구에 기항을 한다면 최대 강점인 은밀성이 사라진다. 전략핵잠수함이 한국에 기항하면 중국, 러시아도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한국과 미국 공군이 지난 4월14일 한반도 상공에서 한국 F-35A 전투기와 미국 B-52H 전략폭격기(가운데 항공기), F-16 전투기가 참여한 가운데 연합공중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미 전략폭격기의 한국 착륙도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과 비슷한 경우다.
전략폭격기 가운데 B-2 폭격기는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은밀하게 타격할 수 있다. 그런데 하늘에서 작전을 펼쳐야 할 전략폭격기가 땅에 내려오면 북한의 공격에 노출된다. 주한 미 공군기지에 착륙한 전략폭격기가 이륙할 때마다 북한은 전술핵에 의한 선제타격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북한은 핵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파괴당하는 상황을 막고자 선제 핵공격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북한은 감시·정찰·조기경보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오판에 의한 우발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실제 억제와 압박 대상인 북한이나 주변국도 군사적 행동을 자제할지는 의문이다. 반대로 더 긴장과 위기가 심화하지 않겠는가”라며 “전략핵잠수함 한국 기항은 확장억제가 아니라 확장위기”라고 말했다.
다만, 그동안 미국 전략폭격기들은 대부분 한반도 상공에 와서 훈련하고 돌아갔지만, 예외도 있긴 했다.
북한의 5차 핵실험 뒤인 2016년 9월 미국 비(B)-1비(B) 폭격기는 한국에 착륙한 바 있다. 통상적인 한반도 상공 훈련만으로는 미국의 확장억제 의지를 보여줄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지금처럼 국민들의 안보 불안감과 확장억제에 대한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처였다.
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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