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조성되는 대로…’ 군사적 보장 열쇠
원자재 제공 이자율등 북 상환조건 명시
원자재 제공 이자율등 북 상환조건 명시
남북이 6일 제12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에서 도출한 합의문의 핵심은 열차 시험운행과 경공업-지하자원 협력에 대한 ‘조건부 합의’라고 할 수 있다. 합의문 제1항의 “‘남북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합의서’를 채택하고, 조건이 조성되는 데 따라 조속히 발효한다”는 조항은 표현을 완화하는 선에서 양쪽의 주장을 절충한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북쪽은 ‘군사적 보장장치가 마련되는 데 따라’ 수준으로 합의문을 작성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남쪽은 좀더 ‘진전되고 명확한 표현’을 요구하면서 철도 시험운행과 경공업 원자재 제공의 연계 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열차 시험운행’이라는 여섯 글자를 빼 북쪽 회담 대표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대신, 북쪽이 모호한 표현이지만 ‘연계 방침’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막판에 극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회담 대변인인 김천식 통일부 남북경제협력국장은 “이행의 강제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시험운행 날짜를 확보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고 밝혔다.
이번 ‘경공업-지하자원 개발협력 합의서’는 이자율·연체율 등 북쪽의 상환조건을 명시했을 뿐 아니라, 광물의 국제시장 가격 등도 적용하는 등 상업적 방식의 첫 남북 경협방식이라 할 만하다. 이번 합의는 지난 5월19일 경협위 위원급 실무접촉에서 잠정 합의를 봤으나 철도 시험운행 취소로 미뤄진 것이다. 애초 지난해 7월 제10차 경협위에서 북쪽이 경공업 분야의 협력 방안으로 5년간 의류·신발·비누의 원자재 제공을 요청하면서 제시한 것은 신발 원자재 6천만켤레분, 화학섬유 3만t, 종려유 2만t이었다. 남쪽 추정으로 1년에 1억7천만∼2억1천만달러씩 5년 동안 모두 8억5천만∼10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것이다. 남북은 1년여 동안 규모와 상환 방식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 5월3일 경협위 위원급 실무접촉에서 남쪽이 철도 시험운행과 경공업 협력을 ‘병행 타결’하자는 방침을 밝히면서 타결의 계기를 찾았다.
이번에 남쪽이 제공하기로 한 경공업 원자재 규모는 8천만달러로, 북쪽이 애초 1년분으로 제시한 금액의 절반 가량이다. 또 남북은 매년 규모 등을 다시 협의하기로 했다. 가장 쟁점이 됐던 첫해 상환 방식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는데 북쪽은 원자재 제공 대가로 대금의 3%(240만달러)를 아연괴와 마그네사이트 클링커로 올해 안에 현물 상환하기로 했다. 나머지 원자재 제공의 대가는 북쪽이 5년 거치 후 10년간 원리금을 균등 분할해 상환하기로 했다. 또 처음으로 이자율 연 1%, 연체이자율 연 4%를 명시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서는 큰 그림일 뿐이다. 어느 지역 광물을 개발할 것인지를 비롯해 경제성을 따져보기 위한 현지조사, 실제 개발에 착수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이나 채굴시설 개·보수 등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회담은 지난달 25일로 예정됐던 열차 시험운행이 무산된 뒤 남북관계의 동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시험운행과 경공업 원자재 제공을 연계하기로 하고 이번 회담에 임했지만, 북쪽의 거부로 합의문 도출에 실패한다면 8월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남북관계 일정이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열차 시험운행이 되지 않아 우리 국민이 분노하고 있어 설득할 수 없는 만큼, 이런 순서가 지켜져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고 밝혔다.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북쪽의 다급한 경제사정도 남쪽의 연계 방침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열차 시험운행의 관건인 군사적 보장 조처는 한강 하구 골재채취와도 연계돼 있어, 이제 남북관계는 남북 군사당국간 군사적 신뢰 없이는 진전을 볼 수 없는 단계에 왔음을 실감케 하고 있다. 지난 4월 장관급회담에서 북쪽이 요청한 50만t의 식량지원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채 경협위 회담이 끝난 것도 이례적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그 문제는 협의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용인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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