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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87년 서울여행 왔다 시위참여…난 미국인 386”

등록 2011-05-08 19:48수정 2011-05-08 20:55

한반도 전문가인 피터 벡 게이오대 방문연구원이 자택에서 한국과 북한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한반도 전문가인 피터 벡 게이오대 방문연구원이 자택에서 한국과 북한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한겨레가 만난 사람] 진보적 ‘한반도 전문가’ 피터 벡
1987년 5월 말,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2학년을 마치고 휴학중이던 키 큰 대학생이 서울에 놀러 왔다.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는 길에 별 목적 없이 온 것이다. 그해 서울 거리는 민주화 시위 물결로 가득 찼다. 거리시위와 최루탄을 생전 처음 접한 대학생은 정체된 미국과는 달리 격변의 역사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경이로움에 전율을 느꼈다. 어느새 시위대에 끼어 뜻도 모르는 “호헌철폐, 파쇼타도,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91년 봄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백골단에 맞아 숨졌을 때에도 거리시위 현장에 있었다. 그때 주운 불발 최루탄을 지금도 ‘전리품’처럼 갖고 있다.

87년 한국의 강렬함을 안고 미국에 돌아간 그는 88년, 89년 다시 서울에 와 연세대, 서울대, 한국외국어대 등에서 한국어와 한국을 배웠다. 그러면서 한국 전문가로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영어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강사와 결혼했고,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대에서 국제관계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87년(배낭여행), 88년(교환학생), 89년(대학원생), 94~95년(외교통상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통역·코디네이터), 2004~2006년(국제위기그룹 서울사무소 대표, 이화여대 객원교수) 등 모두 5차례에 걸쳐 한국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20년간에 걸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중간중간 지켜봤다.

처음 한국에 ‘필’이 꽂혔던 그의 관심은 이후 북한 문제로 넘어갔고, 지금은 진보적 시각을 지닌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워싱턴 한미경제연구소 실장(97~2004년),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2008~2010년)을 거쳐 지금은 일본 게이오대 방문연구원으로 도쿄에 머물고 있다. 지난달 22일(현지시각) 잠시 미국에 들른 피터 벡(44)을 워싱턴 인근 자택에서 만나 한국과의 인연, 북한 문제 등에 대한 견해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미국 386’, ‘85’(학번)라고 불렀다.

인터뷰/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 한국과의 인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87년 한국 방문 뒤, 버클리로 돌아와 전공을 정치학에서 아시아학으로 바꿨다. 때마침 그해 여름 고 리영희 교수가 감옥에서 나와 버클리에서 교환교수로 한국 현대사 강의를 했다. 나는 그때 리영희 교수가 어떤 분인지도 몰랐다. 한국을 알고자 수업을 신청했는데, 100명가량의 수강생 대부분이 한국 학생들이었고, 백인은 나 혼자였다. 교수님은 내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걸 알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읽게 했다. 그리고 <비비시>(BBC) 화면을 담은 ‘광주 학살’(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장면을 보여줬는데,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다큐멘터리를 통틀어 가장 징그러운 화면이었다. 그렇게 한국 현대사를 조금씩 배워나갔다.”


격변의 역사현장 ‘6·10항쟁’ 우연히 접하고 전율
버클리대서 리영희 교수 강의듣고 본격 관심
한국, 이젠 경제보다 정신적 문제에 신경써야

-리영희 교수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나?

“88년 여름 연세대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이 묵는 덕수궁 뒤 대왕여관에 머물렀다. 그때 교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나를 불러들여 그 이후엔 교수님 댁에서 지냈다. 그때 주말이면 교수님과 함께 북한산에 오르곤 했는데, 그때 같이 등산 가서 막걸리 마시며 이야기 나눴던 멤버가 고은 시인, 백낙청 교수 등이었다. 처음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나로선 큰 행운이었다. 89년 교수님이 북한 방문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을 때 사모님과 함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면회했다. 살면서 기억하는 가장 슬픈 장면이다.”

-그때와 지금의 한국은 많이 달라졌나?

“민주화가 많이 됐다. 89년 임수경씨가 북한에 다녀온 뒤 감옥에 갔을 때, 당시 나는 <한겨레> 국민기자석에 ‘한국에 정의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임수경은 감옥 가고, 김현희는 자유로운 부조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본명이 아닌 ‘마이클 피터슨’이라는 가명을 썼다. 비록 내가 외국인이었지만, 안기부란 존재가 그만큼 무서웠을 때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도 국가보안법이 온존하고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은 지난 20년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 북한 문제

-87년 6월항쟁으로 한국을 접했는데, 이후 북한 전문가가 된 이유는?

“한국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북한 문제로 관심이 옮아갔다. 80년대에 한국이 어떻게 독재를 극복하고 경제를 발전시켰는지를 봤다. 이젠 북한이 독재 극복과 경제발전이라는 과제를 어떤 형태로 이뤄내느냐 하는가가 나의 관심이다.”

-북한 식량지원에 대한 생각은?

“정치상황을 떠나 무조건 지원해야 한다.”

-북한에 식량이 많이 부족하지 않지만, 2012년 강성대국을 위해 비축하려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 천안함·연평도 사과가 없는데 식량지원 할 수 있느냐는 주장도 있다. 북한 식량지원 논쟁 앞에 ‘사과-강성대국-모니터링-무조건’ 등의 스펙트럼이 보수에서 진보까지 펼쳐져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나?

“보수적인 사람들의 주장, 충분히 이해한다. 연평도 사건은 민간인이 숨졌기에 천안함보다 더 크고 심각한 문제다. 당연히 지원하고픈 마음이 있겠느냐? 그러나 미국(정부)은 현재 지원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니터링만 확보된다면 지원하는 게 맞다. 강성대국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북한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지원해야 한다.”

-진보적 색채의 학자로는 드물게 ‘북한 인권’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때론 (한국의) 진보진영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북한 인권 문제’는 복잡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보수진영에서 ‘북한 인권’을 강조할 때 진정 ‘인권’을 걱정해서라기보단, ‘북한 정권’을 압박하고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의구심이 진보진영에 있는 것 같다. 진보진영 쪽은 북한 인권 문제도 해결해야 할 사안이지만, 남북한의 특수성을 감안해 좀더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는 것 같다.

“한국과 미국의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 차이가 있다. 미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점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는 건 난센스였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북한 인권’을 점점 강조하고 있다. 단순히 북한을 압박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미 행정부 입장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접근할 때 안보 이슈가 최우선이지만, 북한 인권 문제까지 타협적·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북한 인권 문제는 나중에 관심을 갖게 됐나?

“북한 사람들이 탈북해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등을 떠돌았다. 천신만고 끝에 이들이 한국대사관을 찾았는데, 일부 대사관에서 이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이것은 범죄다. 나는 포용정책을 지지하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6년 당시 이런 보도를 접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일부 문제가 있다고 봤다.”

-6자회담 재개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답답한 것 중 하나는 북한에 대해 ‘핵 보유국 인정 못한다’는 것인데, 이미 보유국인데,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는 것이다. 이란, 이스라엘, 인도, 다 핵 보유하고 있는데, 그들 나라에 대해선 ‘핵 보유국’ 인정했느냐? 앞뒤가 안 맞는다. ‘비핵화’는 개념은 좋지만, 비현실적 목적이다. 지금으로선 ‘비확산’(북한 핵무기 또는 기술이 북한 바깥으로 이전되지 않도록 하는)만 가능하다고 본다. 미국, 한국 모두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북한에는 ‘핵을 포기해야 대화를 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화를 안 하겠다는 얘기다. 연평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 한국 사회

-한국은 보수·진보로 나눠져 있고, 빈부갈등도 심하다. 이방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역동성이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 힘들다.

“한국인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점점 미국 사회를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그렇게 엄청나게 스트레스가 많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회는 스트레스를 다루는 수단들이 존재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런 게 부족하다. 대학에서는 멘토, 사회에서는 안전판 등. 한국은 이제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는 해결했다. 정부가 더이상 성장 문제에 매달려선 안 된다. 10년 전에 비해 한국의 삶의 질이 무척 좋아졌다. 이제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때다.

이 대목에서 언론의 기능이 중요하다. 한국 미디어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한 이슈가 터지면 그쪽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또다른 큰 이야기가 나오면 이전 것은 다 잊혀지고 또다른 큰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식이다.”

■ 일본과 한국

-일본에 살다 보면 한국과의 차이를 많이 보게 될 것 같다.

“일본인들은 이해하기가 더 힘들다.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매우 소극적이다.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체념의 문화가 발달해 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매우 다이내믹하다.”

-그 차이점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북한 등 역사적으로 늘 위협에 처해왔다. 그럼에도 나라를 유지해왔고, 늘 싸워왔다. 그래서 자신감이 넘친다. 거기에 비해 일본은 외세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늘 안정적이었다. ‘섬나라 문화’를 키워왔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차이로 벌어진 것 같다.”

지금은 북한의 독재극복·경제발전이 관심사
한국 진보진영서 북인권 무관심한 건 이기적
북은 이미 핵보유국…비확산이 현실적 목적

-한국과 일본은 지진으로 관계가 호전됐다가, 독도 문제로 다시 벌어졌다.

“독도는 역사적·법적으로 일본 땅이 될 가능성은 0.1%도 없다. 원래 한국 땅인데, 소란스럽게 대응해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더 부각시키는 건 잘못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 후기

-앞으로의 계획은?

“내 별명이 ‘벡 삿갓’이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다가 이제는 가족과 떨어져 일본에 산다.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지 나도 모른다. 다만 한반도 문제에 천착하고 있어 미국 또는 한국의 대학, 정부기관 등에서 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벡의 딸 줄리아(9)가 들어와 아빠 품에 폭 안긴다. 벡은 “한국 이름도 있다”며 “‘사랑 애(愛)’와 영천 이씨인 아내의 성인 ‘오얏 리’를 붙여 ‘벡 애리’”라고 소개했다. 벡은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도 있고, 미국에서도 교회 한글학교에 다니는 줄리아의 한국 발음은 아빠보다 훨씬 또렷했다.

■ 미국의 한국우표협회장 맡아

피터 벡의 집 거실에 김봉준 작가의 민중화 <통일해원도>(1985년 작)가 걸려 있다. 그는 2006년 연세대 부근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민중미술, 대동문화를 좋아한다”며 “미국의 개인주의와 많이 다르고, 지금의 한국 문화와도 다르다”고 말했다.
피터 벡의 집 거실에 김봉준 작가의 민중화 <통일해원도>(1985년 작)가 걸려 있다. 그는 2006년 연세대 부근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민중미술, 대동문화를 좋아한다”며 “미국의 개인주의와 많이 다르고, 지금의 한국 문화와도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우표 많이 수집

피터 벡의 여러 직책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한국우표협회 회장’이다.

그 얘기를 꺼내자, 몇 권의 두툼한 우표책을 갖고 와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난 20여년 동안 모아온 한국 우표들을 보여줬다.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손톱만한 구한말 우표들이 끝도 없다. 100년 전 대한제국에서 누군가가 보낸 편지에 붙인 우표들이다. 그는 똑같은 우표를 우체국 소인별로 모아 놓았다. 또 인쇄가 잘못되거나, 두 장이 붙어 있는 등 수집가들에게 ‘희귀우표’인 흠 있는 구한말 우표들까지. 우표책을 계속 넘기니, 일제강점기의 경인선 철도 부설 기념우표, 해방 직후 미군정 시절의 우표,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우표, 그리고 1970~80년대 우표까지 나왔다. 그가 갖고 있는 한국 우표는 구한말 우표가 몇만장, 북한 우표 수천장 등 모두 “대략 수십만장쯤”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당시, 전국에 있던 392개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우표를 다 구하는 게 평생 목표”라고 한다.

그가 한국 우표를 수집하기 시작한 건 1989년부터다. 연세대에 다닐 무렵, 미국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예쁜 한국 우표에 빠지기 시작해 모으던 것이 취미 차원을 넘어섰다. “수억 갖다바쳤죠”라고 말하면서도 “우표를 통해 한국을 더 깊게 배울 수 있었다. 가보로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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