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이주의 친절한 기자 길윤형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를 가장 들썩이게 만든 이슈를 꼽으라면 아마도 김학의 법무부 차관의 낙마를 불러온 ‘고위층 성접대 의혹’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으로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면, 이번주의 진정한 주인공은 한반도에 난데없이 등장해 모두를 놀라게 했던 B-52라는 이름의 미국의 퇴물 폭격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지난 2월12일 북한의 세번째 핵실험 이후로 시간을 돌려봅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7일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고강도 제재안을 담은 결의안(2094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뒤 한·미 두 나라는 11일부터 키 리졸브 훈련을 시작합니다. 연례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북한은 다시 ‘정전협정의 백지화’ 카드까지 빼들며 강하게 반발하고, 김정은 제1비서는 연평도, 백령도와 살을 맞대고 있는 전방 포병부대를 시찰해 장병들을 독려합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애슈턴 카터 미 국방부 장관이 18일 한국을 찾습니다. 그의 방문에 대한 우리 국방부의 설명은 “최근 한반도 안보상황과 이에 대한 동맹의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알 수 없지만, 한·미 양국 당국자들은 이후 이번 훈련에 B-52가 참여한다는 사실을 전하며 “한국 방어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조지 리틀 미국 국방부 대변인), “필요시 미국이 한반도 방위공약의 일환인 핵우산을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김민석 국방부 대변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B-52란 뭘까요. 영국 <비비시>(BBC) 방송의 표현대로 1953년 첫 시험비행이 이뤄진 “핵 폭격이 가능한 폭격기”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핵 폭격이 가능했던 전략 폭격기는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던 B-29가 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핵 폭격 하면 B-52를 떠올리는 것은 이 비행기가 사람들에게 남긴 강렬한 기억 때문입니다.
B-52가 실전에 배치되던 1950년대 중반은 핵무기가 등장한 냉전의 초입이었습니다. 인류는 동서로 나뉘어 대립했지만 핵전쟁이라는 파국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쪽이 핵전쟁을 감행하면 곧바로 보복을 받게 돼 인류 전체가 멸망한다는 상호확증파괴(MAD)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 이뤄진 덕분입니다.
만약 소련이 보유한 모든 핵무기를 동원해 미국의 전 국토를 대상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은 이에 대비해 어떤 상황이라도 상대에게 보복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미국은 이를 위해 하늘엔 B-52, 바다엔 핵잠수함을 띄웁니다. 여기서 B-52를 하늘에 띄운다는 것은 말 그대로 비행기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공중에 띄워 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미국 <뉴욕 타임스>는 B-52를 “냉전 시기 적의 핵 공격에 대한 전략적인 억지 수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핵무기를 장착한 비행기를 24시간 공중에 띄워 놓다 보니 적잖은 사고가 터집니다. B-52는 1966년 스페인 상공에서는 공중급유를 하다가, 1968년 북극에서는 착륙 과정에서 사고를 일으켜 주변을 방사능에 오염시키는 대재앙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보니, B-52는 핵 억지에 대한 미국의 무식할 정도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읽히기도 하네요.
그런데 한·미 두 나라는 이번 훈련에 B-52가 참여한다는 사실을 왜 굳이 공개한 것일까요? 북한의 반발을 예상하고도 말입니다. 결국 B-52를 둘러싼 이번 소동은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한국 보수진영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한반도 핵무장론 또는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 논의를 차단하려는 거대한 연극으로 보입니다. 너희는 우리가 지켜줄 테니 딴생각하지 말라는 얘기죠. 미국의 창끝은 북한을 겨냥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한-미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독자적으로 고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생산하겠다는 한국 보수층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저나 1950년대 도입돼 60년째 현역인 B-52, 대단하지 않습니까. 워낙 잘 만들어진 비행기이기에 이때 쓰인 여러 아이디어들이 뒷날 보잉사의 다른 민간 항공기에도 많이 채용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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