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판문점에서 44개월 만에 남북 군사회담이 열렸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회담 시작부터 종료 때까지 이를 숨겼다. 아침부터 회담 사실을 담은 보도가 쏟아지고 오전 10시부터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청와대는 “국방부에 확인하라”고 책임을 떠넘겼고, 남북관계 주무 부처인 통일부는 정례브리핑에서 “확인해줄 수 없어 유감이다”라는 말만 20여차례 반복했다. 결국 국방부가 회담이 모두 끝난 뒤인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이 사실을 인정했다. ‘투명한 대북 접촉’을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의 원칙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태도였다.
박근혜 정부는 이전 정부 때 이뤄진 물밑 접촉이나 비밀 접촉이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 아래 남북간 접촉을 투명하게 가져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반론이 적지 않았다. ‘남북관계는 워낙 특수해서 투명성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지적이었다. 진보층과 보수층의 갈등은 물론 미국·중국 등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해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투명성 원칙을 고수했다. 올해 2월 열린 1차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도 북쪽이 ‘비공개’를 요구했지만 우리 정부가 ‘공개’를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정부는 이를 두고 “왜곡된 남북관계가 정상화되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번 남북 군사회담에서는 스스로 정한 ‘투명성 원칙’을 깼다. 북쪽이 비공개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지만, 그동안 보인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통일부 안팎에서는 다른 해석이 나온다. 정부가 남북 군사회담의 결과를 지켜본 뒤 공개 여부를 결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회담에선 대북 전단(삐라)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 등이 다뤄졌다. 북한이 이달 말께 열기로 합의한 2차 고위급 접촉과 이 의제들을 연계할 가능성이 있고, 자칫 우리 정부가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를 우려한 정부가 회담을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도 “회담 결과에 따라 공개 여부를 결정하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잘못된 원칙은 바꿔야 한다. 남북관계에서 언제나 투명함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리할 때는 원칙을 내세우고 불리할 때는 얼렁뚱땅 원칙을 훼손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게다가 다 노출된 회담을 8~9시간 동안 확인하지 않는 것은 언론은 물론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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