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위 인사가 다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의 한반도 배치를 거론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18일 사드 발언에 잇따라 국무부 차관보와 합참차장이 ‘사드의 한반도 영구 주둔’까지 주장하는 등 점점 압박수위를 높이는 모양새다. 미국이 북한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사출 시험을 계기로 사드 배치 압박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그럼에도 정부는 “미국의 요청이 오면 그때 검토해 결정하겠다”는 기존 입장만 되뇌며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다. 정부가 내부적으로 사드 수용 쪽으로 가닥을 잡고도 국내외 여론을 의식해 이른바 ‘전략적 모호성’ 뒤에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프랭크 로즈 국무부 군축·검증·이행담당 차관보는 19일(현지시각) 미 의회에서 열린 한미연구소(ICAS) 주최 토론회에서 “우리가 한반도에 사드 포대의 영구 주둔을 고려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최종 결정을 하지 않았고 한국 정부와 공식 협의를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로즈 차관보의 이날 발언은 미 행정부가 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신중한 행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이를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미 국방·국무부 고위 관계자들은 그동안 기자들이 질문을 할 때만 간단히 답변하는 태도였으나, 이날 로즈 차관보는 기조연설에서 스스로 이런 태도를 표명했다.
제임스 위너펠드 미 합참차장도 이날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열린 ‘미사일방어와 미국 국가안보’ 세미나에서 “한국 정부와 이 문제에 관해 아직 공식으로 어떤 종류의 대화도 시작하지 않았다”면서도 “여건이 성숙되면 대화를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당국자들은 북한이 최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시험을 한 것을 거론하면서, 아직 기술이 초기단계이지만 앞으로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의 이런 적극 공세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수세적이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20일 “미국의 요청이 오면 군사적 효용성과 국가 안보상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라고 비껴섰다. 민 대변인은 다음달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이 문제를 논의할지를 묻는 질문에도 “사드에 대해서는 이러한 답변만 드리겠다”고 피해갔다. 청와대는 미국 고위 인사들의 잇단 사드 발언이 주목받으면서 논란이 확산되는 상황에 대해 곤혹스러하는 분위기라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그러나 정부와 청와대의 모호한 태도가 오히려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드 문제가 정부의 수수방관 속에 정치 쟁점화하면서, 사드의 군사기술적 효용성이나 동북아 안보질서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한 합리적 논의 대신 정치·이념적 찬반 논쟁으로만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내부적으로는 사실상 사드 배치를 용인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도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한 채 여론의 향배를 살피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과거 정부에서 안보분야를 담당했던 한 인사는 “정부가 국회 답변 등을 통해 ‘미국의 요청이 온다면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면 미국이 장난칠 여지가 없어진다”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정책결정자들이 사드 배치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국방부는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가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해 6월 국방부 장관 시절 국회에서 “주한미군이 (사드를) 전력화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말했으며, 한민구 현 장관도 같은 해 10월 국회에서 “사드를 배치하면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드를 남북간 군사적 대결 차원의 효용성에서만 보는 시각이 정부 안에서 대세를 이루면서도, 다만 중국의 공개적인 반대와 국내 논란이 부담스러워 적당한 시기를 고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그러나 섣부른 사드 배치 결정은 중국의 반발 등을 불러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직 안보 당국자는 “사드 도입 문제를 남북간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미-중 갈등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워싱턴/박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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