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오전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새해 남북관계는 ‘복원’ 모드로 출발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 참가 용의” 뜻을 밝히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다음날 바로 “9일 고위급 회담을 하자”고 호응하고, 이를 북한이 3일 다시 ‘판문점 연락 채널 복원’으로 화답했다. 4일엔 문재인-도널드 트럼프 한·미 정상이 “한-미 연합연습 연기”로 숨통을 틔워주자, 5일 북한은 다시 “9일 고위급 회담 제안 수락”으로 응답했다.
북한은 지난해 6차 핵실험을 하고 ‘화성-12’형, ‘화성-14’형, ‘화성-15’형 등 탄도미사일을 잇따라 시험 발사한 뒤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고대하던 미군의 북침에 대한 억제력을 마침내 손에 쥔 셈이다. 그러나 대가는 가혹했다. 지난해에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가 4차례나 강도를 높여가며 내려졌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9년 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대화 공세는 핵무력 완성의 자신감으로 무장한 북한으로서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수순으로 보인다. 남북관계 개선은 더욱 엄혹해진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국면을 헤쳐나가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무엇일까 싶다.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경제 문제에 주력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과는 달리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북한 경제는 2016년 3.9% 성장한 것으로 추정됐지만, 지난해는 심한 가뭄으로 북한의 식량 작황이 크게 나빠질 것이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전망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북한과의 대화에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는데 무슨 대화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북한의 대화 제의는 위장 평화공세로 진정성이 없다거나, 한-미 동맹을 이간질하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전선에 균열을 내려는 술수라는 얘기도 나온다. 결국 남북대화는 북한의 술책에 말려드는 것이니 하지 말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우리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안보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실낱같은 기회라도 있다면, 지레 겁먹거나 의심하고 예단해 포기할 이유는 없다. 북한이 새해 들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보인 배경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북한이 한-미 동맹의 틈을 벌리려고 틈만 나면 온갖 술수를 부려왔다는 것도 변치 않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탓해 무엇 하겠는가.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잘 대처해가면 그만이다.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건 2011년 12월이다. 벌써 6년이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남북간 갈등과 대결, 단절이 깊어지면서, 남북 교류나 접촉 경험이 매우 제한됐기 때문이다.
만나는 게 우선이다. 무슨 생각인지,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직접 들어봐야 상대를 알게 된다.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도 나온다. 지난해 잊을 만하면 불거지기를 여러 차례 했던 ‘한반도 위기론’이 올해 또 반복되는 사태를 그냥 지켜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북관계는 이제 첫 단추를 끼우려고 하는 단계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 9년 동안 남북대화가 단절되고 한반도 정세가 격랑을 겪으면서 많은 게 변했다. 비교적 남북관계가 좋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엔 북한의 핵·탄도미사일 능력이 제한적이었다. 제네바 합의와 6자 회담 등 비핵화 회담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이 수소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고, 비핵화 회담은 거부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1일 신년사를 보면 북한은 핵 문제를 남북대화의 의제로 삼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남북관계 개선은 북핵 문제 진전 없이는 제한적이다. 또 그리 높지 않았던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이제 대북 원유 공급을 제한할 만큼 세밀하고 강력해졌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의 재가동 같은 경제협력을 복원하는 것도 만만찮은 과제가 됐다. 곳곳이 지뢰밭인 앞길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문재인 정부의 역량이 본격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박병수 정치에디터석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