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과 함께 9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맨 오른쪽)이 영접 나온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6년 전인 2012년 2월 북한과 미국은 중국 베이징에서 비핵화 협상을 벌인 끝에 ‘2·29 합의’를 내놓는다. 북한의 최고권력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사망한 지 불과 두달 만이다. 아직 김정은 후계체계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을 때였음에도 북-미 간 전격 합의에 이른 것이어서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합의의 뼈대는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 활동 등을 임시 중단하고 대신 미국은 북한에 식량(영양) 24만t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격 성사됐던 이 합의는 두달 만에 역시 전격적으로 파기된다. 북한이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4월15일)을 기념해 ‘광명성-3호’(은하-3호) 발사를 강행한 것이 빌미가 됐다. 북한은 “평화적 목적의 위성 발사”라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장거리미사일로 규정하고 “2·29 합의 위반”이라며 대북 식량지원을 거부했다. 2·29 합의 파탄의 후유증은 컸다. 북-미 간 뛰어넘기 어려운 불신의 장벽이 세워졌고, 대화는 영영 실종됐다.
북한이 지난달 돌연 건군절을 4월25일에서 2월8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을 때 2·29 합의의 전례가 새삼 떠올랐다. 한반도 정세가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와 남북 단일팀 구성 합의 등으로 이제 겨우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데, 올림픽 개막식 하루 전날 북한이 건군절 기념식을 빌미로 대규모 열병식(군사 퍼레이드)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2·29 합의 때와 상황이 꼭 같진 않겠지만 모처럼 조성된 대화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을 것 같았다. 또 그렇게 된다면 향후 남북관계에 미칠 여파가 만만찮을 것으로 보였다.
북한은 8일 건군절 70돌 열병식을 강행했다. 그러나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의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관례도 무시하고 행사의 규모를 줄였고 생중계도 하지 않았다. 절제된 행보로 대외 메시지보다 국내 행사로 제한하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북한이 한반도 정세에 미칠 부정적인 여파를 최소화하고 ‘올림픽 이후’를 내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북한은 이번에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섰지만, 그 과정이 매끄러웠던 것만은 아니다. 북한은 아무 설명 없이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등 예술단 사전점검단의 파견을 돌연 취소했다가 다음날 재개했고, 애초 4일 금강산에서 열기로 합의했던 남북 문화합동공연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눈에 거슬리는 무례한 행동이다. 남북 간 불신이 여전히 깊은 현실에서 북한의 진의를 의심케 하는 자충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올해 들어 진행된 남북회담에서 과거와 같은 신경전이나 힘겨루기 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합의를 하고, 그 결과 북한의 올림픽 참가가 진행됨에 따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첫 고비는 넘긴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9일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평창올림픽 고위급 대표단으로 파견한 것은 파격이다. 그만큼 김정은 위원장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나 남북관계 전망이 밝아졌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북한은 2014년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도 권력 핵심인 황병서 당시 총정치국장 등을 전격 파견했지만, 남북관계 개선에 아무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꼭 같진 않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 정세를 갈등과 대결에서 화해와 공존으로 전환하는 길은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우선 평창올림픽이 끝나면 재개될 한-미 군사연습이 변수다. 북한이 정면에서 반발하고 나설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올림픽을 계기로 마련된 대화 국면은 일시적 유화 국면에 그칠 개연성이 크다. 또 남북관계는 북핵 문제와 일정 정도 연동돼 있다. 북핵 문제 진전 없이 남북관계 개선은 제한적이다. 따라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미 간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게 우선 필요하다. 북한의 핵 정책과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내야 하는 쉽지 않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박병수 정치에디터석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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