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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13년 전 오늘, 북핵 합의 실패와 9월 평양공동선언

등록 2018-09-19 14:42수정 2018-09-19 16:32

[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13년 전, 2005년 9월 19일 ‘9.19 공동성명’ 합의
<한겨레> 2005년 9월20일 치.
<한겨레> 2005년 9월20일 치.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고, 이른 시일 안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할 것을 약속했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13년 전, 2005년 9월19일은 북한이 ‘모든 핵을 포기한다’라는 ‘결단’을 국제 사회에 천명한 날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개국 수석대표들은 이날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6자 회담에서 이른바 ‘9.19 공동성명’에 합의했습니다. 이날 합의는 북한의 핵 포기가 한반도 비핵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평화 체제 구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긴장감을 끝낼 것이라는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9.19 공동성명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핵 포기가 먼저냐, 핵 포기에 따른 보상이 먼저냐를 두고 당사자인 북-미와 한국을 중심으로 치열한 셈이 오갔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한반도는 전 세계에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 중인 국가로 남게 됐습니다. 끝내 9.19 공동성명이 이행될 수 없었던 다섯 가지 기록을 당시 보도를 통해 다시 짚었습니다.

1. 미국의 대북 금융거래 차단

미 재무부의 대니얼 글레이저 부차관보가 돈세탁 등 북한의 불법자금 거래혐의를 주장하며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제재 조치에 관해 발표하고 있는 모습(왼쪽). <한겨레> 2005년 12월30일 치.
미 재무부의 대니얼 글레이저 부차관보가 돈세탁 등 북한의 불법자금 거래혐의를 주장하며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제재 조치에 관해 발표하고 있는 모습(왼쪽). <한겨레> 2005년 12월30일 치.
9.19 공동성명 합의 이튿날인 9월20일, 미국은 공동 합의문에 잉크도 채 마르기 전 북한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여갔습니다.

북한의 핵 개발 저지의 명목으로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돈줄 죄기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카오에 본사를 둔 방코델타아시아(BDA)는 북한 관련 50계좌 2400만 달러에 대해 동결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국 9.19 공동성명 후속 이행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11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5차 1단계 6자 회담은 결렬로 끝이 났습니다. 북쪽에서 ‘금융제재 해제 우선’을 요구했지만 미국에서 ‘불법행위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이후 6자 회담은 장기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 남-북한 입장 차

- 북한의 ‘3대 장벽’ 제거 요구 vs 남한의 ‘6자 회담’ 재개 요구

<한겨레> 2005년 12월16일 치.
<한겨레> 2005년 12월16일 치.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제재와는 별개로 9.19 공동성명 합의 직후 남북은 장관급 회담을 잇따라 열었습니다. 공동 보도문에 담을 내용을 조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남북 간 의견 절충 또한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12월15일 열린 17차 회담에서 남쪽은 북한의 핵 문제를 비롯해 군사 회담 조속 개최, 국군 포로 및 납북자 문제 해결 등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면서 6자 회담이 재개되면 대북 송전 제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8.15 민족대축전 참여차 방한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등 북측대표단 일행이 국립묘지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8.15 민족대축전 참여차 방한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등 북측대표단 일행이 국립묘지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반면 북쪽은 정치·군사·경제 등 3대 장벽 제거를 우선으로 맞섰습니다. 북한은 당시 남한 사람들의 북한 현충원 참배 금지 조처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는데요. 북쪽 대표단은 2005년 8.15 민족대축전 참여차 방한했을 때 현충원을 참배했기 때문에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얘기였습니다. 아울러 북한은 한미합동군사연습 중단과 전략물자 수출 통제 해제도 구체적으로 요구해왔습니다.

당시 김천식 남쪽 회담 대변인은 “남북 회담에 100차례 직·간접으로 참여했는데, 쉬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 한미 연합전시증원 연습과 독수리 훈련

2006년 실시된 한미 연합전시증원훈련. <한겨레> 자료 사진.
2006년 실시된 한미 연합전시증원훈련. <한겨레> 자료 사진.
9.19 공동성명은 큰 진전 없이 결국 해를 넘겼습니다. 이런 가운데 한미연합사령부가 매년 봄 실시하는 군사 훈련을 개시했습니다. 1994년부터 실시된 훈련은 한반도 유사시를 가정해 미군 증원 전력의 이동과 한국군의 지원 절차 등을 익히는 연례 연습입니다. 2002년부터는 야외 기동훈련인 독수리 연습과 통합돼 이뤄지고 있습니다.

2006년 실시된 한미 연합전시증원훈련. <한겨레> 자료 사진.
2006년 실시된 한미 연합전시증원훈련. <한겨레> 자료 사진.
북한은 즉각 항의했습니다. 한미연합사령부의 훈련은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9.19 공동성명 규정의 위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미연합훈련에는 미국의 재래식 공격 무기인 항공모함, 전투기, 구축함이 동원됩니다. 아울러 미국 군함에는 공격 무기인 핵무기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공격에 대한 방어훈련이라는 입장이지만, 북한은 중대한 군사도발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보복하겠다고 매년 주장했습니다.

4. 대포동 2호 최초 발사와 1차 핵실험

<한겨레> 2006년 7월6일 치.
<한겨레> 2006년 7월6일 치.
9.19 공동성명 합의문을 발표한 지 열 달이 채 되기 전인 2006년 7월5일, 북한은 미사일 ‘대포동 2호’를 최초로 발사했습니다.

미사일 발사는 새벽 시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북한은 5일 새벽 3시32분께부터 강원도 안변군 깃대령 소재 발사장에서 2발의 노동 미사일을 시작으로 5시 전후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대포동 2호를 발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 뒤, 오후 5시22분께에는 7번째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북한의 기습적인 미사일 발사로 인해 한반도에는 또다시 위기 국면이 조성됐습니다.

<한겨레> 2006년 7월6일 치.
<한겨레> 2006년 7월6일 치.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통해 “우리 군대는 이번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자위적 억제력 강화의 일환으로 미사일 발사 훈련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의 이런 발표는 미사일 발사는 주권국가로서의 합법적인 권리로서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한겨레> 2006년 10월10일 치.
<한겨레> 2006년 10월10일 치.
북한은 이날 미사일 발사를 시작으로 석 달 뒤인 10월9일에는 ‘지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정세는 정면 대결의 분위기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5. 불신이 커질수록 멀어진 평화

- 증유 지원과 영변 냉각탑 폭파

<한겨레> 2007년 2월13일 치.
<한겨레> 2007년 2월13일 치.
도발 분위기 속에서 다시 분위기가 반전된 건 ‘북한 에너지 지원’ 관련 보도가 나오면서부터였습니다. 2007년 2월13일 이뤄진 5차 6차 회담 3단계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북한의 초기 단계 핵 폐기 대 5개국의 에너지 지원’ 문제를 두고 절충을 거듭했습니다.

<한겨레> 2008년 6월28일 치.
<한겨레> 2008년 6월28일 치.
<한겨레> 2009년 3월 18일 치(위), 2008년 11월 14일 치.
<한겨레> 2009년 3월 18일 치(위), 2008년 11월 14일 치.
이를 두고 북한은 “(에너지) 보상량을 통해 미국의 적대정책 전환 의지를 판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 등 5개국은 “‘북핵 폐쇄’ 범위나 속도에 따라 지원하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한겨레> 1994년 10월 15일 치.
<한겨레> 1994년 10월 15일 치.
이렇듯 북한과 5개국이 각각 조처와 지원을 두고 서로 눈치 싸움을 벌이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는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북한과 미국은 1994년 각각 핵 사찰 허용과 경수로 및 중유 제공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이른바 ‘제네바 합의’입니다.

북한 영변핵시설. <한겨레> 자료 사진.
북한 영변핵시설. <한겨레> 자료 사진.
그러나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은 원유 가격 상승 등의 이유로 합의를 착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이에 북한은 핵동결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미국 또한 2001년 미국에서 일어난 9·11테러 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3대 테러국가로 지목했고, 합의 파기를 선언합니다. 결국 서로 다른 셈법으로 얻은 경험이 상대를 향한 수십 년 간의 불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 로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 시작에 전 악수를 하고 있다. 2018년 9월 18일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후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 로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 시작에 전 악수를 하고 있다. 2018년 9월 18일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이런 역사를 뒤로 하고, 2018년 9월 평양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9일 ‘9월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북한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하고 미국의 상응 조처에 따라 영변 핵시설 영구적 폐기를 약속한다는 내용을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은 또 올해 답방 형식으로 서울을 방문해 문 대통령과 4차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 평양공동선언’ 전날인 18일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공식 환영만찬에서 “역지사지의 자세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넘어서지 못할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정은 북한 국무 위원장은 “불신과 대결의 늪 속에서 과감히 벗어나 이제는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민족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 새대로 당당히 들어선 데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남북 두 정상은 다시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13년 전 시작된 실패의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화보] 2018 평양 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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