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이 개성공단의 전경이 보이는 사진 앞에서 남북 청년의 스타트업 협력이 활발히 이뤄지는 새로운 개성공단의 구상을 설명하고 있다.
▶ ‘유무상통’.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며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누린다. 이 말은 어쩌면 개성공단의 지난 경험에서 얻은 남북 경협의 원리이자 출발점일 수도 있다. 개성공단은, 이제 노동집약적 산업들의 유무상통을 넘어 첨단기술 벤처기업의 유무상통도 꿈꾸고 있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을 만나 ‘남북 스타트업 협력’ 구상을 들어봤다.
개성공단에 공장 소리가 끊긴 지 3년. 2004년 12월15일 ‘남북의 첫 역사적 합작품’으로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냄비 3000세트가 서울에서 판매되면서 화제가 된 이래, 개성공단은 125개 기업이 5만5000명 북한 노동자를 고용해 5억6329만달러의 생산량(2015년)을 내는 공단으로 성장했지만, 2016년 2월 갑작스레 문을 닫고 말았다.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2016년 2월10일 개성공단 입주 기업을 모두 철수시켰다. 개성공단 공장은 언제 다시 활기를 찾을까? 지난해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개성공단 재개의 기대는 커지고 있다.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이하 지원재단)의 김진향 이사장은 최근 “개성공단이 재개되면 남북 청년들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협력의 마당을 더하자”는 제안을 하고 나섰다. 지원재단은 개성공단 입주 기업을 지원하는 재단법인으로, 이사장이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의 개성공단은 청년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을까?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전환 필요
지난달 17일, 청년 창업지원기관인 서울 역삼동 팁스타운 에스원에서 ‘개성공단을 활용한 남북 스타트업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회의장은 방청객 200~300명으로 꽉 찼다. 김진향 이사장은 심포지엄을 시작하며 “개성공단엔 이미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남북이 협력한 오랜 경험이 있다”면서 “남북 스타트업들은 새로운 남북 경협 시대를 빠른 시간 안에 담보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포지엄엔 전유택 평양과학기술대 총장과 싱가포르의 비영리 대북교류단체인 ‘조선익스체인지’의 매니저 이언 베넷 등 관련 인사들이 참석해 과학기술 분야의 남북 창업 가능성의 기대를 한껏 높였다.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지원재단 사무실에서 김진향 이사장을 만나 구상을 들어봤다.
-개성공단은 노동집약적 산업단지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는데 여기에 남북 스타트업 마당을 열자는 구상이 신선하게 들린다.
“분위기, 환경, 조건을 만들어주자는 거다. 북한의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과학기술자들이 오고 남쪽의 기획자, 디자이너, 엔젤투자가들(개인 벤처투자자)이 모일 것이다. 물론 사업화 단계에선 다른 과정이 필요하지만 초기에는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 그런 만남의 장을 만들자는 거다. 그러면서 필요한 게 생기면 지원할 수 있다. 개성공단이니까 그런 게 가능하다.”
-스타트업 협력에서 유망한 분야는 어떤 것들인가.
“몇 차례 북한 과학기술자들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깊게 살펴본 건 아니라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북한은 기본적으로 군사국가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오랜 동안 군수기술을 공개하지 않고 (민간산업에 활용하는) 민수기술로 전환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013~14년 무렵부터 군수기술의 민수화에 나서면서 많은 경공업 제품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4~5년 전만 해도 장마당에 중국 제품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북한이 스스로 만들어낸다. 북한의 민수화 기술들 중에서 협력으로 시너지를 높일 분야를 찾고 사업화를 모색하는 협력의 마당이 필요하다. 일단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협력이 이뤄지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걸로 본다.”
-어떤 방식으로 스타트업 협력이 이뤄질 수 있을까.
“개성공단에선 법으로 북한과 합작, 합영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북이 만나면 개성공단의 현재 조건이 이렇고 제재 상황이 저렇다는 얘기가 오갈 테고, 그런 조건과 제재를 어떻게 피할지도 논의될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풀 문제이고 정부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용?피고용 관계로 만날지, 돈 말고 다른 것으로 거래할지, 이익 배분은 어떻게 할지도 알아서 하면 된다. 서울에 팁스타운이나 창조경제혁신센터 같은 스타트업 지원 공간이 있다. 젊은이들이 모여 대화하고 토론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창업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개성공단에 그런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북한도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은가?
“북쪽 사람들한테서 ‘우리도 함께 세계 1등 제품, 세계 선도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말을 자주 들었다. 사실 여러 제재 때문에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에는 노동집약적인 섬유봉제 기업이 많다. 첨단기술 산업은 개성공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북한 사람들은 ‘언제까지 섬유봉제만 할 거냐’며 답답해한다.”
“북도 ‘언제까지 봉제만’ 답답해해”
올해 워킹그룹 만들어 후속 작업
“제재 안 풀려도 공단 재개 가능
…남북경협 확장되고 고도화될 것”
“대가 없는 재개” 북 신년사 주목
하지만 국제사회의 북한 제재는 계속되고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남북 대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올해에는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까? 지난 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전제 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며 적극적 의지를 밝혔다. ‘전제 조건 없는 재개’에 더해진 ‘대가 없는 재개’라는 표현은 무얼 의미할까?
-북한의 신년사를 어떻게 보셨는지.
“신년사의 전후맥락, 지난해와 올해의 상황, 정세를 감안할 때 ‘대가 없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세 차례 정상회담을 했고 남북관계에서 굉장한 국면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논의된 많은 경협 사업들도 있다. 그런데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철도도 착공 없는 착공식만 했다. 개성공단은 사실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남북관계 개선의 입구에 놓여 있지만, 2016년 중단 이후에 국제 제재 때문에 재개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유엔 제재가 금지하는 달러 박스, 즉 대량 현금(벌크 캐시)이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과 핵 개발로 흘러들 수 있다는 추정이 그런 주장의 배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신년사는 ‘개성공단이 남북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곳인데, 돈이 정말 문제가 된다면 대가 없는 재개도 논의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해석이 맞는지 확인된 건 아니지 않나?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전면적인 개선 의지를 표명한 것은 분명하다. 만나서 얘기하자, 안보리 제재가 문제라면 어떻게 풀지 얘기하자는 의지 표명이라고 본다.”
-개성공단이 본래 안보리 제재의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유엔 안보리 제재에 예외조항이 있다. 북한 노동자의 민생에 도움을 주는 사업이나 한반도 평화에 복무하는 사업은 제재 대상에서 빠진다. 그래서 유엔 제재는 2013년에 시작됐지만 당시에도 개성공단은 제재 대상에 들어 있지 않았다. 개성공단은 3년 뒤인 2016년에 박근혜 정부의 결정으로 문을 닫았다. 이제 와서 개성공단 재개를 유엔 제재와 연계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2008년 11월 김진향 이사장이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맨왼쪽)으로 근무할 당시에, 개성공단을 방문한 김영철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실 국장(왼쪽에서 세 번째)을 안내하고 있다. 김진향 이사장 제공
-개성공단 재개 논의의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는가?
“그러기를 기대한다.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의 첫 번째 입구이며 평화의 상징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평화의 상징인 개성공단 문제조차 풀지 못하면서 다른 뭘 하겠느냐’고 볼 것이다.”
-개성공단과는 인연이 오래 됐는데.
“참여정부 시절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에서 한반도평화체제 담당관으로 일할 때 개성공단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다. 본래 개성공단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있던 사업인데 참여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성공단보다 남북 평화에 더 좋은 건 없다’며 강하게 추진해 2003년 착공할 수 있었다.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의 인수위원회 시절에, 퇴임을 앞둔 노 대통령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김 박사, 개성공단은 별일 없겠지’ 하고 걱정하듯이 물으셨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1주일 동안 많은 고민을 했고 결국 자원해서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으로 일하게 됐다. 2011년 2월까지 3년간 있었는데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입주 기업들의 생산량은 늘었고 그게 개성공단을 유지하는 유일한 이유가 됐다.”
“평화로 가는 가장 쉬운 길”
남북한의 벤처 창업가들에게 만남의 장을 제공한다는 구상이 실현되기까지는 여러 장애들이 있다. 무엇보다 북미 관계가 개선되고 국제사회의 제재가 풀려야 한다. 하지만 김진향 이사장은 유엔 제재가 풀리지 않더라도 주변국이 양해한다면 개성공단 재개와 남북 스타트업 협력은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개성공단이 재개되더라도 과학기술 분야의 남북 경협은 또 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지.
“현재 정세에서 첨단기술 산업은 개성공단에 들어가지 못한다. 미국 제재가 풀리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만 스타트업 협력에서 물리적으로 장비가 필요한 건 아니다. 개성공단에서는 기술과 아이디어, 마케팅과 엔젤투자가 만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런저런 창업이 가능하겠네, 한번 해보자’ 하는 창업계획서를 만드는 과정이 이뤄지도록 개성공단에 장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러고서 투자자나 제도가 필요하면 그걸 지원해줄 수 있다. 생산은 중국이나 미국, 서울에서 해도 된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처음부터 산학연이 다 모인 게 아니다. 개성공단에서도 남북이 만나다보면 대학도 들어서고 연구소도 들어서면서 실제적 협력의 장이 갖추어질 것이다. 시간은 걸릴 것이다.”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
“창업진흥원 같은 곳에서 후속 추진과 남북 창업 공간 마련을 꼭 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엔젤투자자나 보증보험, 투자신탁들에서도 여러 문의가 있었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거니까. 올해 워킹그룹을 만들어 후속 작업을 더 진행할 계획이다.”
-평양과학기술대가 남북 스타트업 협력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평양과기대는 북한 교육성과 한국 동북아교육문화협력재단이 함께 설립한 대학이다)
“전유택 총장 등 평양과기대 교수 몇 분을 오래 만나왔다. 그분들은 평양과기대의 장기 전망에 대해 많이 걱정하고 계신다. 학생을 키워도 보낼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고민을 하시기에 ‘개성공단에서 뭐든 함께 해보자’ ‘뭐라도 상상해보자’라고 했다. 개성공단 2단계, 3단계 개발 때 평양과기대 분교나 연구소도 들어서는 날이 올 수도 있고.”
-개성공단에 스타트업 협력을 위한 공간이 있는가?
“1단계로 개발된 100만평 중에 잔여 29필지 땅이 있다.(3단계까지 총 800만평 개발 예정) 당장 이용할 시설로 기술교육센터, 종합지원센터가 있고 아파트형 공장도 있다.”
-청년 참여를 강조하시는데.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젊을수록 남북 협력에 대한 고정관념도 적고 열정도 클 테니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남북 청년 스타트업들이 만들어지는 날을 기대한다.”
-개성공단이 재개되면 지금과 다른 면모를 갖출 것 같다. ‘개성공단 2.0’이라 부를 만할까.
“개성공단이 올해 안에 재개될 것으로 기대한다. 재개되면 이전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사실 개성공단이 그동안 잘못 알려져 왔다. 개성공단은 본래 남북 평화의 공간인데다 돈도 엄청 벌린다. 퍼주기가 아니라 사실 퍼오기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야 한다. 개성공단에 들어가려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개성공단은 평화의 가치에 복무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 ‘유무상통’(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함)의 상징이다.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은 들어가기 힘들 수 있다. 제2, 제3의 개성공단이 생겨날 테고 남북 경협은 앞으로 확장되고 고도화할 것이다.”
김 이사장은 본래 북한학 연구자였다가 참여정부 시절에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대통령비서실에 들어가면서 개성공단과 오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3년 동안 개성공단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북한학자로서 매우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하는 그는 “개성공단은 평화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쓴 말도 ‘개성공단’과 ‘평화’였다.
글·사진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