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테헤란대학교 담장에 걸린 ‘솔레이마니 사령관 추모 포스터’ 앞을 한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테헤란/박민희 기자
거리마다 건물마다 ‘순교자 솔레이마니’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올해 초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살해된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은 미국에 맞서 이란인들을 단결시키는 강력한 상징이다. 21일(현지시각) 치러진 이란 총선거에서도 그는 테헤란 시내 곳곳에서 투표소를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헤란 시내 호세이니에 에르샤드 모스크에 마련된 투표소에는 아침 8시 투표가 시작되기 전부터 검은 차도르를 입은 여성들과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줄을 섰다. 이란에서 검은 차도르를 입은 여성들은 대부분 신앙심 깊은 친정부적 보수층으로 여겨진다. 중도개혁파 지지 유권자의 특징으로 꼽히는 서구적 옷차림의 젊은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투표소에서 만난 이들은 미국에 대한 분노, 솔레이마니에 대한 추모를 투표 참여의 주요 이유로 꼽았다.
투표를 마치고 나온 고위 성직자 아야톨라 모르타자비는 “투표를 하러 온 이 사람들을 봐라. 미국의 제재와 잘못된 행동들은 우리 이란인들을 막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 국민들의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원 유세푸르는 “미국은 우리의 발아래 있다. 우리가 솔레이마니 사령관이다”라고 쓴 푯말을 들고 투표장에 나왔다. 딸과 함께 투표하러 왔다는 마리암 몰라히는 “정부를 지지하고, 순교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특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의회(마즐리스) 290석을 뽑는 이번 총선은 반미 강경보수파의 압승으로 확인되고 있다. 비공식 중간집계 현황을 보면, 전체 290개 의석 중 178석을 강경보수파 후보들이 확보해, 무소속 후보(43명)와 온건개혁파 후보(17석)들을 압도하고 있다. 수도 테헤란에선 30개 선거구 전체에서 보수파 후보들이 1위를 달리고 있는데, 특히 혁명수비대 장성 출신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전 테헤란 시장이 이끄는 강경 보수 후보들이 약진하면서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예고하고 있다. 2016년 총선에서 중도·개혁파가 테헤란에서 압승을 거뒀던 것과 정반대 양상이다.
군부 세력을 중심으로 한 강경보수파의 압승은 이미 예고돼 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혁명수호위원회(이슬람 법학자 12명으로 구성된 기구)는 주요 개혁파 후보들의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후보로 나선 1만5천여명 가운데 7296명의 출마 자격이 박탈됐는데, 이들 대부분이 중도, 개혁파로 알려졌다. 미국 재무부는 20일 헌법수호위 의원 5명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이번 총선거는 미국과 이란 정부에 대한 이란인들의 민심을 보여주는 시험대로 주목받았다. 미국의 솔레이마니 암살과 이란의 미군 기지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전쟁 문턱까지 가는 듯했던 긴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이란 핵합의(JCPOA, 포괄적 행동계획) 탈퇴와 초강경 경제 제재는 이란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미국과 협상을 추진해온 온건개혁파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미국에 강하게 맞서야 한다고 부르짖는 보수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회 저변에는 만연한 부패와 경제난, 휘발유값 인상에 항의해 일어난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과 이란군의 민항기 격추 등을 둘러싼 실망과 분노의 정서가 똬리를 틀었다.
개혁파 지지자들, 특히 젊은 세대들 가운데선 ‘투표 불참’으로 불만을 표시하자는 운동이 확산됐다. 선거를 앞두고 만난 테헤란의 여대생 파리야는 “난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 불만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 대부분이 투표하지 않을 것이고, 부모님들에게도 투표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이 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다”라고 말했다.
대학 행정직원인 모즈간도 “나는 현 체제를 신뢰하지 않는다. 부정부패가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상황 악화, 자유의 부재에도 항의한다”며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가 악화된 데는 미국의 제재 탓도 있지만 이란 정부의 책임도 있다”며 “트럼프의 일방적인 핵합의 탈퇴와 제재에 대해 분노하지만, 트럼프 때문에 이 정부를 지지할 수는 없다”고 토로했다.
테헤란대학교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가하려고 지방에서 온 젊은 여성들인 레일라와 케이잘도 “현 상황에서는 투표를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방의 경제 상황은 테헤란보다도 훨씬 어렵다. 실업 문제와 빈부격차가 심각하다. 교육받은 사람들도 일자리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했다.
21일 테헤란 호세이니에 에르샤드 모스크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테헤란/박민희 기자
지난 2017년 대선에서 미국과의 핵합의 유지와 제재 해제, 경제난 해결을 약속한 중도개혁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에게 희망을 걸었던 청년들은 이제 ‘희망이 없다’며 냉소하고 있다. 2015년 이란과 미국 오바마 행정부, 유럽 국가들이 이란의 핵 개발 동결과 제재 해제에 합의하면서, 이란에 찾아왔던 낙관적 분위기는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제재를 잇따라 강화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미국은 이란의 핵 개발을 확실히 차단하고 미사일 개발도 막는 새로운 합의를 맺겠다며 이란의 ‘자금줄 차단’에 나섰다. 이란의 석유 수출을 중단시키고, 이란 중앙은행을 제재 대상에 올리는 등 국제 금융거래도 차단했다. 이란 리알화 가치는 지난해 60%나 폭락했고, 공식 물가상승률은 38.6%에 이르렀다. 중도파 로하니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파 정치세력은 강경파의 집중공격을 받는 처지가 됐다. 교육 수준이 높고 개방적인 사회를 원하는 도시의 청년층, 특히 히잡(머리 스카프) 의무 착용을 비롯한 사회적 통제에 반발하는 여성들은 ‘출구 없는 사회’에 대한 절망을 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지도부는 이번 총선의 투표참여율을 체제의 견고함과 지도부에 대한 국민의 충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보여주려 했다.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투표 참여는 종교적 의무이고 국가의 이익을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강경파의 압승이 예고된 이번 선거의 초점은 정권의 투표 참여 호소에 이란인들이 얼마나 호응했는지를 보여줄 ‘투표율’에 모아졌다. 이란 내무부는 23일 이번 총선 투표율이 42.6%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투표 당일 오후 6시 마감 예정이던 투표 시간을 자정까지 6시간이나 연장하는 등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조처에도 불구하고,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최저 투표율이다. 수도 테헤란의 투표율은 25%다.
21일 테헤란 호세이니에 에르샤드 모스크에서 투표를 마친 모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 테헤란/박민희 기자
투표 불참으로 저항하려는 이들과 투표소로 향한 정부 지지층의 물결이라는 극과 극의 여론이 이란의 혼란스러운 현재를 보여준다. 하지만 정부에 이견을 가진 이들마저 미국에 대한 분노라는 점에서는 ‘단결’하고 있다. 선거 전날인 20일 당사에서 만난 중도개혁파 의원인 무스타파 카바케비안은 “누구도 트럼프를 신뢰할 수 없다. 그의 말과 약속은 믿을 수 없다”며 “유감스럽게도 한국을 포함해 이란의 친구인 국가들도 유엔의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미국의 요구를 따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2018년 미국은 ‘최강의 압박’이라는 이름의 최악의 제재를 시작했고 이란인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은 솔레이마니를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란인들의 응답을 들어봐라. 제재와 솔레이마니 살해에도 불구하고 이란인들은 더욱 단결하고 있다. 미국이 다시 협정을 준수하고 돌아와야만 우리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테헤란의 카펫 상인이자 여행가이드로 일하는 하디는 제재로 거래가 끊기자 때때로 터키로 가서 여행가이드 일을 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그는 “트럼프가 핵 협상을 일방적으로 깨면서, 경제가 엉망이 됐다. 해외와의 금융거래가 다 막혀서 해외 고객이 물건을 사고 싶어도 팔 수가 없다. 삼성 등 외국 기업들도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트럼프는 최악의 날강도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정권의 정책은 반대하지만, 미국이 맘대로 이란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을 통제하려는 것은 반대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테헤란/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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