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가장 처음 공개 고백한 김학순 할머니. <한겨레> 자료사진
14일은 전쟁 수행을 위해 여성 인권을 처참하게 짓밟은 중대한 ‘국가범죄’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지 딱 30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환경’은 어느 때보다 더 열악하다. 일본 정부는 2015년 12월 12·28 합의에서 “1㎜도 움직일 수 없다” “국가 간 합의는 정권이 바뀌었다 해도 지켜져야 한다”(7월13일 일본 외무성 문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한국에선 2020년 총선 무렵 터진 ‘윤미향 사태’로 인해 투쟁 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해결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답답한 교착 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외침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일본 정부로부터 올바른 사죄를 받아내는 일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이뤄내야 할 거대한 ‘시대적 과제’가 됐다. 처음엔 여성들이 “업자들에게 속아 간 것”이라는 불성실한 답변에 머물던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4일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내놓게 된다.
사죄 않는 일본…고노 담화 이후 사과나 법적 책임 안 져
하지만 한-일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1965년 한-일 협정’의 벽 앞에서 무력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여성기금)을 만들어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지만, ‘65년 체제’를 이유로 들며 “정부 예산은 투입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한국 사회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범죄임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도의적 책임’ 인정에 머무른 일본의 ‘여성기금’을 거부했다. 그와 동시에 김학순 할머니가 포함된 1991년 12월 소송, ‘관부재판’으로 알려진 1992년 12월 소송, 재일동포 송신도 할머니의 1993년 4월 소송 등 세차례 소송이 이어졌지만, 결과는 모두 패소였다. 일본 사회를 통한 정치적, 법적 해결의 길이 모두 막히고 만 것이다.
그러자 한국에선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일본 법원이 소를 기각한 이유로 제시한 한-일 협정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공개하라는 ‘외교문서 공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8월 문서를 공개하며 위안부 문제는 “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헌법재판소는 2011년 8월 일본 정부와 교섭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뻔뻔한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놓게 된다.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시작됐다. 한국의 집요한 외교 공세에 놀란 일본 사회는 이를 여성의 인권 회복 노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명예를 손상하려는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내에선 거대한 혐한 열풍이 불었고, 한-일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미적대는 한국…박근혜 정부 12·28 합의로 한계 봉착
한국의 외교적 시도도 한계에 부닥쳤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의 부상’에 맞서려면 한·미·일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2015년 말 ‘12·28 합의’를 맺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이 합의에서 자신들이 인정하는 것이 ‘법적 책임’인지 ‘도의적 책임’인지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책임을 통감한다”고 선언하며 10억엔(약 108억원)의 정부 예산을 기금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 대신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약속했다. 12·28 합의는 한국 시민사회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월 “일본에 재교섭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한국 법원을 통해 이 문제가 일본의 국가범죄임을 인정받으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지난 1월8일 나온 1차 판결은 원고 승소였지만, 4월21일 2차 판결은 패소였다. “주권국가는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국가 면제’ 원칙의 적용 여부를 두고 재판부의 판단이 갈라진 탓이다.
어떻게 이 교착 국면을 돌파해야 할까.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학자와 활동가들은 이젠 한국 사회가 목표로 하는 ‘문제의 해결’이 무엇인지 사회적 공감대를 확보하고, 일본을 향해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변화를 촉발한 계기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 등 일본 사회 원로 7명이 지난 3월24일 내놓은 성명이었다. 이들은 12·28 합의가 “불충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양국 정부에 이 “합의의 정신을 다시 한번 높여가기 위한 노력을 요청”했다.
한국에서도 대화문화아카데미와 서울대 일본연구소를 중심으로 이 요청에 성실히 응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난 5월26일, 6월30일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각자 위치에서 노력해온 학계·시민단체 인사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터놓는 토론회를 진행했다. 그동안엔 12·28 합의를 보완해가자는 쪽과 폐기한 뒤 새 합의를 시도해야 한다는 이들 사이의 골이 깊어 이런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를 위한 ‘유용한 출발점’으로 고노 담화를 주목했다. 12·28 합의는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망각’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고노 담화는 이 문제의 기억·전승·계승(“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가고 싶다”)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토론회의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 원로들이 제시한) 12·28 합의를 보완해가자는 데에는 참가자들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고노 담화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거기서 새로 시작하자는 데에는 많은 참가자가 공감했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정부도 지난 6월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민관 협의회의’를 만들어 지금까지 세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아직 사람들의 견해가 많이 다르지만, 시민사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정부도 움직일 수 있다”며 “한·일 시민사회와 더 많은 소통을 통해 정부가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적인 토대를 제시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