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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한반도 판박이’ 아일랜드섬…벨파스트평화협정 24년 ‘빛과 그림자’

등록 2022-11-12 13:58수정 2022-11-12 15:49

[한겨레S] 기획
공존 불가능한 평화가 공존하는 공간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를 동서로 양분한 ‘평화의 벽’의 일부. 칼릴 지브란의 연작시 <사람의 아들 예수> 중 “너희 이웃은 담 뒤에 가리어 있는 또 다른 너희 자신이다. 이해하는 가운데 모든 담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라는 시구의 일부가 적혀 있다.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를 동서로 양분한 ‘평화의 벽’의 일부. 칼릴 지브란의 연작시 <사람의 아들 예수> 중 “너희 이웃은 담 뒤에 가리어 있는 또 다른 너희 자신이다. 이해하는 가운데 모든 담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라는 시구의 일부가 적혀 있다.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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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섬’(island of Ireland)은 멀다. 영국보다 멀다. 비행기로 9049㎞, 17시간20분 걸린다. 직항은 없다.

하지만 아일랜드섬은 한반도와 아주 가깝다. 제국주의 침략→독립투쟁→분단→무장갈등→평화공존 모색의 역사적 궤적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무엇보다 아일랜드섬은 성금요일협정(벨파스트 평화협정, 1998년 4월10일) 이후 사반세기 가까이 무장갈등을 잠재우고 공존·평화·화해의 터전을 넓히려 애쓰고 있다. 그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는 폭력과 갈등에 시달리는 세계시민의 참조 모델이자 아일랜드섬의 최고 수출품이다. ‘1보 전진, 2보 후퇴’를 거듭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지친 한반도의 8천만 시민·인민한테 ‘절망보다 힘이 센 희망’의 징표일 수 있다.

아일랜드섬은 16세기 영국 제국주의에 짓밟혔다. 쉼 없는 저항과 독립전쟁(1919~1921년)을 거쳐, 1921년 12월 아일랜드섬 26개 주가 ‘아일랜드자유국’으로 ‘연합왕국’(United Kingdom·영국) 자치령의 지위를 얻었다. 일본인 식민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가 ‘식민지 조선’을 ‘일본의 아일랜드’에,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사람을 ‘동양의 아일랜드인’에 빗댄 역사적 배경이다.

공존 불가능한 두 공간의 공존

흔히 ‘북아일랜드’라 불리는 아일랜드섬 북동쪽 얼스터(Ulster) 지방의 6개 주는 영국의 4개 ‘홈네이션’(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의 하나로 남았다. 당시를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엿볼 수 있다.

‘아일랜드자유국’은 1949년 영국에서 완전 독립했고, 지금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자 1인당 국민소득이 7만4520달러(2021년 기준)에 이르는 부국이다. 북아일랜드는 지금도 영국의 ‘홈네이션’이다. 그런데 영국이 2020년 1월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유럽연합에서 떨어져 나왔는데도, 북아일랜드는 ‘유럽공동시장’에 남았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하고, 영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데, 북아일랜드는 유럽공동시장에 속한다? 북아일랜드의 이중정체성, 주권 개념을 재구성해온 유럽연합의 오랜 실험 따위가 ‘공존 불가능한 것의 공존’을 가능케 한 밑둥치다. 예컨대 브렉시트 투표 때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와 달리 유럽연합 잔류(55.8%)를 선호했다. 남영호 신한대 교수는 “브렉시트는 브리티시 모두가 아닌 잉글리시만을 위한 민족주의”라며 “브렉시트가 북아일랜드의 아이리시 정체성을 강화한 듯하다”고 짚었다. 더구나 아일랜드섬이 분단된 1921년 북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2에 이르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지금 43.5%로 가톨릭의 45.7%보다 적다(2022년 9월22일 북아일랜드 인구통계국). 북아일랜드가 아이리시 정체성이 강한 가톨릭 다수 사회로 바뀐 것이다.

벨파스트 가톨릭-개신교 공동체의 통합을 추구하는 ‘아르-시티’(R-CITY)의 앨런 웨이트(왼쪽)와 쇼나.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벨파스트 가톨릭-개신교 공동체의 통합을 추구하는 ‘아르-시티’(R-CITY)의 앨런 웨이트(왼쪽)와 쇼나.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아일랜드섬의 오늘이 보여주는 ‘공존 불가능한 것의 공존’ 속에서 무장갈등을 눅이고 분단을 넘어설 공존과 화해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평화번영의 한반도’를 꿈꾸는 이들한테 각별히 중요하다. 한국과 아일랜드섬의 평화 연구자·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경험과 고민을 공유하며 ‘평화의 길’을 조금이라도 더 넓히려 하는 까닭이다. 지난 4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탈갈등 정의’(post conflict justice) 연구소와 신한대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원장 최완규)이 ‘화해’를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를 진행했다. 2016년 서울, 2017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이어 세번째 만남이다.

‘장벽 없는 남-북’ 성금요일협정의 정신

북아일랜드가 아일랜드섬 갈등의 화약고가 된 데는 긴 역사가 있다. 영국은 아일랜드섬을 식민화한 뒤 북동쪽에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개신교(장로교) 농민·노동자를 이주시켜 공업지대로 집중 개발했다. 영화 <타이타닉>의 그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를 만든 조선소가 벨파스트에 있었다. 그렇게 북아일랜드에 스스로를 ‘연합왕국’의 구성원으로 여기는 개신교 세력이 다수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땅엔 이미 터를 잡고 살아온 아이리시 가톨릭 사회가 있었다.

하여,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섬 갈등의 주된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와 두번째로 큰 도시인 ‘(런던)데리’가 대표적이다. 1972년 이후 두 도시 곳곳에서 서로를 죽이는 ‘무장충돌’의 악순환이 북아일랜드에 지옥도를 그렸다. 1981년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양심수로 ‘영국의 잔혹함’에 맞서 66일 단식투쟁 끝에 숨진 보비 샌즈는, 전두환의 광주학살에 맞서 40여일간 옥중 단식 끝에 숨진 박관현, 일제에 105일간 옥중 단식으로 저항하다 조국의 별이 된 독립운동가 이한빈의 다른 이름이다. 영화 <어느 어머니의 아들>(1996년)과 <헝거>(2008년)가 샌즈의 죽음을 다뤘다.

성금요일협정으로 ‘세 끈 관계’(북아일랜드 내부/남-북 아일랜드/영국-아일랜드)의 안정화·제도화를 도모한 지 사반세기 가까이 흐른 2022년 11월에도 북아일랜드를 양분하는 균열선은 온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 5일 찾은 벨파스트엔 도시를 동서로 양분한 ‘평화의 벽’(peace wall)이 굳건했다. ‘평화의 벽’은 애초 1970년대 초반 이후 개신교 무장세력과 가톨릭 무장세력이 서로 상대방 주거지역에 난입해 총을 쏘고 화염병으로 집을 불태우는 무장충돌이 격화하자, 일상을 지키려는 ‘보호벽’으로 양쪽 지역민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무장충돌이 잦아들었는데도 ‘평화의 벽’은 완전히 철거되지 않았고, 때론 더 높아졌다. 돌담 위에 양철판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철조망을 올려 10m까지 높아진 벽도 있다. 벽 사이의 통문은 날마다 해가 지면 닫힌다. 완전한 차단이다. 벽에 쓰인 “이해하는 가운데 모든 벽은 무너져버릴 것이다”라는 칼릴 지브란의 시구가 무색하다.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벨파스트 캠퍼스)의 데이비드 미첼 교수는 “양쪽 사람들 모두 벽이 자기네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여기는 것 같다”며 “2023년까지 평화의 벽을 모두 철거하기로 한 합의의 이행이 어려울 듯하다”고 말했다.

가톨릭교도를 많이 쏘아 죽여 ‘탑건’이라 불린 스티브 매케그의 사진이 한 건물 벽면을 채우고 있다.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가톨릭교도를 많이 쏘아 죽여 ‘탑건’이라 불린 스티브 매케그의 사진이 한 건물 벽면을 채우고 있다.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벽이 없어도 소통은 활발하지 않다. 벨파스트의 가톨릭-개신교 집단 거주지의 접경지역인 섕킬로드에선 도로를 넘나드는 이가 없다. 도로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분리장벽’이다. “저놈들이 싫어서” “무서워서” “싸우고 싶지 않아서” 길 건너 1분 거리의 생필품점을 피해 10분 넘게 걸어 다른 상점을 이용한다.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김동진 박사는 “섕킬로드에선 서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편의시설이 두 배로 필요하다”며 “가난한 섕킬로드 사람들한텐 엄청난 부담”이라고 짚었다. 벨파스트에서 연수 중인 권동혁 통일부 과장은 “(벨파스트 북쪽) 발리클레어에 산 1년 동안 가톨릭신자를 단 한 명도 직접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발리클레어의 인구 1만8570명(2019년) 가운데 85.72%는 개신교, 가톨릭이 5.35%다. 사회적 분리는 심각하다. 얼스터대의 그로녀 켈리(Grainne Kelly) 박사가 “마을의 화해, 일상의 화해가 절실하다”고 강조하는 까닭이다.

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는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인가? 그렇지 않다. 공존·화해를 위한 노력은 ‘세 끈 관계’ 모두에서 이뤄지고 있다.

아일랜드섬을 남-북으로 가른 국경검문소는 2005년까지 모두 철거됐다. 국경엔 어떤 물리적 장애물도 없다. 도로는 이어져 있고, 사람과 차량은 무심히 표지 없는 국경을 넘나든다.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브렉시트 이후에도 유럽공동시장에 남게 된 데에는 남-북 아일랜드 사이에 어떠한 장벽도 만들어선 안 된다는 성금요일협정의 정신이 작용했다.

“당신들의 슬픔은 모두 같아요”

벨파스트 시의회는 2013년 시청사에 ‘유니언잭’(영국 국기) 게양을 금지하는 결의를 채택해 지금껏 실천하고 있다. 아이리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위한 공존 노력이다. 시청사 1층 ‘성찰의 공간’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나는 당신이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든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들의 슬픔은 모두 똑같아요.”

그리고 “마을은 청년들을 통해 통합된다”는 모토를 내걸고 섕킬로드 양쪽의 가톨릭-개신교 공동체의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아르-시티’(R-CITY)다. 살면서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가톨릭-개신교 청소년을 만나게 하고 친구가 되도록 돕는다. ‘아르-시티’는 섕킬로드 양쪽의 비밀 무장조직과 청소년을 두고 경합한다. 이 단체의 공동 창설자인 앨런 웨이트는 비밀 무장조직의 살해 대상 명단에 올라 있지만 굴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쇼나는 ‘아르-시티’의 도움으로 개신교 친구를 사귀었고, 지금은 이 단체의 상근 활동가다.

벨파스트 시청사 1층 ‘성찰의 공간’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나는 당신이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든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들의 슬픔은 모두 똑같아요.”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벨파스트 시청사 1층 ‘성찰의 공간’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나는 당신이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든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들의 슬픔은 모두 똑같아요.” 벨파스트/이제훈 기자

지난 5일 섕킬로드에서 만난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개신교 무장조직의 지역 책임자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감옥에 있었다. 아버지는 성금요일협정 이후 ‘우리 아이들이 감옥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무기를 내려놓았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엔 이웃마을의 가톨릭교도를 많이 쏘아 죽여 ‘탑건’이라 불린 스티브 매케그의 거대한 사진이 아직도 건물 외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그 벽에 스티브가 아니라, ‘아르-시티’를 통해 가톨릭 친구를 사귀고 지금은 여성단체 위민스에이드(Women’s Aid)에서 화해를 위해 헌신하는 스티브의 조카 리베카의 초상이 걸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벨파스트·더블린/글·사진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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