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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내 몸이 별로인가 싶었던 그날 ‘섭식장애’ 고통의 늪에 빠졌다

등록 2023-02-18 14:00수정 2023-02-18 15:28

[한겨레S] 기획 - 섭식장애를 아십니까
‘먹는 일’에 어려움 겪는 정신장애
수십년씩 ‘거식-폭식-구토’ 반복도
인구 3% 규모 추정…나이 낮아져
주변의 관심과 치료 타이밍 중요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기획자 박지니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기획자 박지니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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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섭식장애는 젊은 여성들의 신경증, 다이어트 강박에 빠진 여성들의 허영 중독쯤으로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프로아나’(거식증 찬성, 또는 찬성자들)에 대한 비난이 많죠. 편견에서 벗어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는 담론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지니(43)씨는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의 기획자다. 오는 24일부터 3월2일까지 서울 전역 독립서점에서 섭식장애 당사자, 치료 전문가, 작가 들이 강연과 토크를 벌이고 유튜브로도 중계한다. 외출이 힘든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씨는 “30년간 집에서 홀로 섭식장애를 앓아왔다는 어떤 분이 고맙다는 말을 전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섭식장애는 먹는 행동과 관련해 어려움을 겪으며 개인의 신체적 건강과 심리사회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정신장애를 가리킨다. ‘거식증’이라 일컫는 ‘신경성 식욕부진증’과 폭식과 구토가 반복되는 ‘신경성 폭식증’, 폭식으로 고통받지만 구토나 설사제 남용 등 보상 행동을 하지 않는 ‘폭식장애’, 필요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않고 식사를 회피하는 ‘회피제한적 섭취장애’ 등을 포함한다. 섭식장애는 지속적인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도 동반한다.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쓴 책들.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쓴 책들.

섭식장애 ‘당사자’ 이야기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질병을 겪은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섭식장애의 경우 당사자 활동가들이 인식 개선 캠페인을 펼치고 체질량지수(BMI)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환자들의 치료접근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도록 촉구한다. 한국에서는 2019년부터 섭식장애 당사자들이 쓴 회고록이 여러권 출간되었다. <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라미), <또, 먹어버렸습니다>(김윤아),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김안젤라), <나는 식이장애 생존자입니다>(사예), <날것 그대로의 섭식장애>(정유리) 등이다. 박지니씨도 2021년 자신의 20여년간 거식증 경험을 담은 책 <삼키기 연습>을 펴냈다. ‘환자’가 아니라 ‘화자’가 되기 시작했다.

박지니씨는 1997년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거식증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살이 찔까 두려운 마음이 시간을 지배했다. 급기야 1999년 대학 2학년 때, 먹고 토하는 폭식증으로 이어졌다. 국내 몇 안 되는 섭식장애 전문클리닉을 다녔지만 호전과 악화를 거듭했다. 거식-폭식-구토를 오가는 삶은 25년 동안 계속됐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녔지만 섭식장애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관련 자료를 파고들었다. 지금은 정신장애 전문지에 글을 기고하고, 외국 섭식장애 당사자이자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직장에 다닐 만큼 부분적으로는 회복했지만 여전히 섭식장애와 함께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섭식장애를 호소하는 분들 가운데 성소수자들이 많아요. ‘지금의 몸’으로 살 때 불편한 사람들이 섭식장애 속으로 들어가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섭식장애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회복할 수 있는 허영 중독이 아니에요. 지금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죠. 이번 행사로 섭식장애의 ‘납작한’ 이야기를 ‘납작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박지니)

영국에 본사를 둔 친환경 화장품 브랜드 러쉬와 서울 서대문구 ‘밤의서점’ 등에서 도움을 주었다. 행사 주최는 인제대 섭식장애정신건강연구소와 ‘잠수함토끼콜렉티브’가 함께한다. 섭식장애를 경험한 유튜버이자 당사자 내러티브 연구자이기도 한 이진솔,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감독 김보람) 주연으로 섭식장애 당사자인 박채영씨, 그리고 남지영 밤의서점 점장과 함께 박지니씨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섭식장애 환자들이 단순히 피해자나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잠수함 속 토끼처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담아 붙였다.

1989년 영국에서 최초로 창립한 섭식장애 자선재단 ‘비트’(Beat) 누리집.
1989년 영국에서 최초로 창립한 섭식장애 자선재단 ‘비트’(Beat) 누리집.

‘정신질환에서 비롯?’ 오해와 진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섭식장애(F50) 환자 수는 2017년 8168명에서 2021년 1만900명으로 증가했다. 2021년 섭식장애 환자 중 여성은 총 8833명, 연령대를 보면 20~29살 여성이 2248명으로 가장 많았다. 80살 이상 여성도 1921명에 이르렀다. 노인들의 섭식장애는 신체적 기능이 떨어져 식욕을 잃은 것인데, 정신질환 문제로 잘못 판단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런 공식적인 질병 통계에서 섭식장애 환자의 수가 너무 적게 잡히거나 왜곡된 것도 현실을 똑바로 보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섭식장애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정신건강의학과 김율리 교수는 “섭식장애의 유병률은 인구의 3%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2021년 기준 5174만명인 한국의 경우 155만명에 이른다. 의료보험에 잡힌 통계가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섭식장애를 재현하는 이미지도 현실과 거리가 멀다.

“최근 어느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거식증으로 나오던데, 그 남자는 생산성도 좋고 사회적으로 전혀 위협되지 않는 존재였어요. 그저 여성의 사랑이 있으면 낫는 존재더라고요.”(박지니)

섭식장애는 의료비가 많이 든다. 섬세한 조사와 훈련된 전문가, 충분한 치료 기간도 필요하다. 2015년 영국이 지출한 1인당 섭식장애 연간 치료비는 8850파운드(약 1430만원)에 이르렀다. 1989년 영국에서 최초로 창립한 섭식장애 자선재단 ‘비트’(Beat)는 섭식장애에 관한 정보 제공과 온라인 상담, 지지집단 조직, 전문가 양성 등을 이어가고 있다. 섭식장애 연구로 특화된 미국 하버드대 챈 공공보건대학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의 섭식장애 평생 유병률은 전 인구의 9%에 이르렀다. 당사자, 부모 들의 노력에 힘입어 미국에서는 섭식장애 조기 발견을 위한 예산 확보와 의료보험 보장성 확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다.

“국가가 치료 비용을 지원하는 영국은 대기 시간이 길다 보니 기다림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엄청난 서류를 계속 내다 보면 지쳐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요. 다만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연구가 대단히 활발하죠. 한국도 심리학, 철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당사자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길 바랍니다.”(박지니)

미국의 섭식장애 퇴치재단 프로젝트 힐(HEAL) 누리집. 치료 비용 마련이 어려운 섭식장애 환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설립됐다.
미국의 섭식장애 퇴치재단 프로젝트 힐(HEAL) 누리집. 치료 비용 마련이 어려운 섭식장애 환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설립됐다.

먹지 못하는 아이들

2001년부터 섭식장애 환자들을 만나기 시작한 안주란 백상정신건강의학과 부설 백상식이장애센터 센터장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섭식장애로 미끄러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환자들의 연령대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치료한 아이들 가운데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도 있고, 요즘은 남자아이들도 많아지고 있어요. 남자 성인 환자들도 조금씩 문의를 하거나 치료를 받으러 오는 경향이 보입니다.”(안주란)

안 센터장은 국내에 몇 안 되는 섭식장애 식사 치료 전문가다. 섭식장애의 식사 치료는 일반적인 식이요법과는 다르다. 식이요법이 특정 질병을 호전시키기 위해 저지방, 저염식 등으로 음식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면 식사 치료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먹더라도 정상식을 할 수 있도록 내적 통제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먹으면 살이 찔 것이라는 공포, 뚱보나 돼지가 될 것이라는 불안, 식욕에 지고 마는 약한 사람이라는 자괴감 등을 가진 아이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보살핀다. 음식에 대한 극단적 생각에서 벗어나 음식을 허용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음식을 두고 먹도록 하는 식사 치료를 하다 보면 아이들 십중팔구는 거부하고 울거나 화를 내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 먹는 것은 네가 앞으로 살아가며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아주 큰 경험이 될 것이라고 얘기해줍니다. ‘네 손으로 그 어려움을 떠먹어가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요.”(안주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섭식장애는 마음의 문제가 크다. 10대 여자아이들은 2차 성징이 나타날 때 거식증에 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성으로서 정상적인 성장·발달을 유예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안 센터장은 또한 부모의 구실을 강조했다. 현재 한국에는 섭식장애 전문 입원병동이 없고, 대형병원 폐쇄병동으로 간다고 해도 전문 프로그램이 없어 소아청소년 환자가 타 정신질환의 성인 환자와 함께 입원하는 병동에서는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장기간 소요되는 긴 싸움을 하는 동안 부모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요즘은 부모가 아이들의 외모 관리를 자극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부모가 먹는 다이어트제를 나눠 주거나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아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억압적인 부모 아래 사춘기 시절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 아이들이 유일하게 자율성을 가지는 방편으로 먹는 것을 조절하며 살을 뺄 때, “예뻐졌다”는 식으로 기뻐하거나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외모 지적 한마디가 곧바로 섭식장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기획자 박지니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기획자 박지니씨.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식사 치료를 한 뒤 드라마틱하게 좋아지는 아이도 있어요. 이게 타이밍이에요. 치료엔 타이밍이 정말 중요해요. 그리고 부모가 단호함과 따뜻함으로 버텨주는 것이 필요합니다.”(안주란)

이렇듯 주변에 ‘먹는 문제’를 가진 사람이 있거나, 스스로 힘들어한다면 먼저 여러 당사자의 목소리 들어보기를 권한다.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신청은 인터넷(event-us.kr/edaw/event/56820)으로 할 수 있다. 행사 개요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스타그램(@rabbitsubmarinecol) 참고.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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