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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잘못된 인식·선택이 부른 ‘참사’…과거 털고 가자는 말, 위험하다

등록 2023-03-12 17:49수정 2023-03-13 11:09

강제동원 해법 어떻게 볼 것인가
[기고]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지난 6일 정부가 발표한 ‘대법원 판결 관련 해법’에는 대법원 판결이 없다. 이날 제시된 정부 해법은 식민지배 불법성을 전제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참사다. 우리 사법부가 저지른 국제법 위반 상태를 우리 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라며 일본 정부가 강요한 프레임을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대일 협상의 내용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 문제 해법으로 제시했던 ‘그랜드바겐’조차 되지 못한 내용이다. 그래서 이건 외교 참사도 아닌 그냥 참사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잘못된 인식과 선택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관계 악화의 모든 책임이 문재인 전 정부에 있다는 인식을 보여 왔다. 수출규제조치로 한국인의 경제적 생존권을 위협하던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죽창가’만 부르다가 일본에 당했다는 인식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다.

수출규제조치가 대법원 판결 때문이라고? 일단 일본 정부 스스로가 부정하는 논리다. 대법원 판결이 잘못된 것이라고? 대법원 판결은 우리 헌법정신과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에 입각해 내려진 당연한 법리적 판단이었다. 그것도 이미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2년에 내려진 판단을 확정했을 뿐이다. 사법농단이 단죄되자, 당연한 결론이 당연히 나왔다. 사법농단 주역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한 것은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또 3차장 검사로 수사를 지휘했던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장관이다. 현 집권 여당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확인됐다며 일본의 태도변화를 기대한다고 표명했다. 대법원 판결은 당파 정파를 떠나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발로였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가?

우리가 잘못해서 망했다는 인식은 3·1절 기념사에 그대로 드러났다. 사실관계가 맞지 않을뿐더러 매우 정략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반일정서로 한일관계를 망친 게 아니라, 윤석열 정부가 ‘반조국 정서’에 올라타 한일관계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누가 정치를 대일 외교에 이용하는가?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부에서 추진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실패로 규정하고, 대신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선택했다. 미일동맹의 하위동맹으로 편입되는 한미동맹의 현실 속에서 한국 정부의 위상과 협상력은 약화됐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개입하려는 일본이 한국 정부에 국제법 위반 딱지를 붙여 현상변경 세력으로 몰아갔다. 미국을 일본에 대한 지렛대로 삼으려는 계산이 윤 정부에 혹시 있었을지 모르나, 미국의 압력은 오히려 한국으로 향했다.

잘못된 인식 하에 대일협상 카드를 모두 버리고, 잘못된 선택으로 미국이라는 지렛대가 거꾸로 향하면서, 3월6일의 참사는 예견됐다.

조짐이 있었다. 지난해 9월27일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이 있었던 날, 이에 참가한 한덕수 총리가 기자간담회에서 한 발언이 불길했다. 그는 “국제법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건 사실”이라고 하여 일본 쪽 인식을 고스란히 수용했다. 그날 국장에서는 스가 전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심정에 빗대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야마가타는 주권선·이익선 개념으로 구성되는 일본 지정학을 창안했고,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저격당할 때까지 이를 실행에 옮겼던 당사자다. 국제법은 이들이 한국을 길들이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침략적 행동을 국제법으로 포장했다.

야마가타와 이토의 인식은 전후 일본의 한반도 인식에 면면히 이어졌다. ‘평화헌법’을 중시하며 전후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요시다 시게루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이토를 들고, 청과 러시아 등 대륙 세력으로부터 일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한반도를 장악하려했던 그의 안목을 칭송했다. 요시다에게 한국전쟁은 하늘이 도운 전쟁이었고, 한반도 현상유지를 위해 한일국교정상화를 배후에서 지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대선 토론에서 “유사시에 (자위대가) 들어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발언했다. 유사시라면 자위대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고, 이를 위해 한미일 군사동맹도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발언하는 후보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됐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을 면책하면서 협력 파트너가 되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뉴라이트가 추켜세우는 이승만 대통령 조차 1951년 1월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군의 유엔군 편입 가능성을 검토했을 때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국군은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일본에선 메이지 초기를 방불할 기세로 지정학이 유행하고 있다. 메이지 지정학으로 침략전쟁에 나섰던 일본에서 패전 후 오래 금기시되던 단어다. 급기야 ‘극동 1905년 체제’론이 나왔다. 러일전쟁의 결과 한반도와 대만이 일본과 함께 힘으로 유지되는 하나의 진영에 묶여 동아시아 세력균형 체제를 이뤘고, 일본의 패배로 유동화했던 이 체제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극동 1905년 체제’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사실상 하나의 제도로 작동하는 실체다. 여기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처리된다. 대법원 판결 ‘관련’ 우리 정부 해법이 나온 뒤에는 한반도 유사시 지휘통제기구 재편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현 한미연합사령부 체제에선 일본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며, 유사시 일본이 감수할 리스크를 고려하여 계획입안의 장에 일본의 자리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미래를 보고 털고 가자는 말을 그냥 흘려 듣기 어려운 상황이다. 위험하다. 조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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