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가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조선인 노동자 등 조선인 122명이 숨졌다고 기록된 군함도(하시마)의 전경. 나가사키/교도 연합뉴스
[수교 50돌 새 한-일관계 탐색]
군함도 징용 실태
1891~1974년 석탄 1570만t 채굴
중국인도 15명 희생
군함도 징용 실태
1891~1974년 석탄 1570만t 채굴
중국인도 15명 희생
일제강점기 군함도(하시마)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떤 노동을 감당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떻게 숨졌는지는 일본 공문서과 생존자의 증언 등을 통해 전모가 드러나 있다.
군함도에서 처음 석탄이 발견된 시기는 1810년이다. 이후 1890년 미쓰비시합자회사(이후 미쓰비시광업주식회사)가 섬을 매수한 뒤 본격적으로 해저 탄광 개발을 시작했다. 1891년부터 1974년 폐광까지 이곳에서 채굴된 석탄의 양은 1570만t에 이른다.
탄광 안의 노동 조건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광부들은 똑바로 설 수도 없는 좁은 갱내에서 장기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현재 섬의 방문객들에게 나눠주는 팸플릿에도 “탄광 안의 기온은 평균 30℃, 습도는 95%였다. 항상 가스 폭발 등 위험과 마주하며 작업하는 것은 무척 가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군함도 옆에 있는 또 다른 탄광섬인 다카시마의 경우 섬을 나가려면 죽어야 한다는 의미의 ‘지옥섬’이란 악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2012년 보고서에서 1944년 군함도에 약 500~8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1925~1945년에 이 섬에서 숨진 조선인은 122명으로 분명한 숫자가 공개돼 있다. 일본 시민단체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한 회원이 섬을 방문했다가 이 시기에 숨진 일본인 1162명, 조선인 122명, 중국인 15명의 이름·본적·사망일시·사망원인 등의 정보가 담긴 정사무소(한국의 동사무소)의 공문서(화장인허증)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17살 이상 조선인의 사망원인을 살펴보면, 병사 30%, 외상으로 인한 사망 14%, 변사는 26.1% 등으로 나타난다. 위원회는 “변사 등은 탄광 재해가 원인으로 보이나 가혹행위에 따른 죽음일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좁은 섬의 해저 광산에 많은 광부들을 투입하다 보니, 섬에는 토지 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그 때문에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지어지는 등 섬 곳곳에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군함도(나가사키)/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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