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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애초 잘못 꿴 ‘한일협정’…식민지배 합·불법 논란 남겨

등록 2015-06-02 21:49수정 2015-06-03 10:17

1965년 12월18일 이동원 외무장관(왼쪽 넷째)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오른쪽 셋째)이 정부청사 장관실에서 한일협정 발효를 축하하며 축배를 들고 있다. 협정 체결은 이에 앞서 1965년 6월22일 도쿄의 일본 총리관저에서 이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5년 12월18일 이동원 외무장관(왼쪽 넷째)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오른쪽 셋째)이 정부청사 장관실에서 한일협정 발효를 축하하며 축배를 들고 있다. 협정 체결은 이에 앞서 1965년 6월22일 도쿄의 일본 총리관저에서 이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수교 50돌 새 한-일관계 탐색] ② 키워드로 본 한일 50년
식민지배 불법성
“현재 일한조약을 추진하는 일본 정부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를 긍정하고 있다. 여기에 이 조약이 가진 제국주의적 성격의 근거가 있다.”

지난달 4일 도쿄 주오구 니혼바시공회당에서 만난 와다 하루키(77) 도쿄대 명예교수는 낡은 가방 속에서 자신이 50년 전 직접 작성했던 성명서를 꺼내 들었다. 이 글은 일본 지식인 사회가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 반대 의견을 밝힌 사실상 최초의 성명서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이 성명은 당시 일본 최대 재야 역사가 단체였던 역사학연구회(1932년 창립)의 주도로 도쿄 지요다구 학사회관 분관에서 열린 ‘일한조약에 반대하는 역사가들의 모임’에서 처음 공개된 것이다. 와다 명예교수는 “당시 소장 학자였던 내가 초고를 쓰고 역사학연구회 위원회가 내용을 추인해 발표했다. 성명의 글씨는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부친이 등사판에 철필로 쓴 것”이라며 웃었다.

와다 명예교수는 “성명은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식민지배를 비판하고 있지만, 당시 일본에서 식민지배 역사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지식인들 내부에서도 극히 소수였다. 50년 전 일본 정부는 당연히 식민지배를 반성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에 견줘 한국에선 정부의 굴욕적이고 반민족적인 대일 외교를 질타하는 학생·시민들의 반대 투쟁으로 1964년 6월 계엄령과 대학 무기한 휴교령(6·3항쟁)이 내려지는 등 박정희 정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 때문에라도 일본의 식민지배를 어떻게 판단하고, 이를 새 조약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는 대한민국의 존엄은 물론 정권의 명운이 걸린 사활적인 문제가 된다.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만 35년 동안 행해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를 이룬 지 올해로 반세기가 되지만 양국은 여전히 이 근본 질문에 대한 공통의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양국 사이의 핵심적 외교 현안인 ‘아베 담화’를 둘러싼 갈등도 결국 일본의 식민지배를 어떻게 평가할까라는 이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 “을사조약 처음부터 무효” 해석
일본 “원래는 합법…1965년 무효로”
식민지배 사죄·반성 회피
1995년 무라야마·2010년 간 담화로
비로소 반성과 사죄…화해의 싹
하지만 아베정권 들어 뒷걸음질
한국, 한일협정 개정·보완론 고개

■ “이미 무효”라는 애매한 봉합

한·일 양국은 1965년 6월22일 도쿄에서 정식 서명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조에서 “1910년 8월22일(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을사조약 등)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못박았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근거가 되는 조약이 ‘무효’(null and void)이니, 백지 위에서 새로운 양국 관계를 쌓아가자는 뜻이다.

일견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이 문장은 사실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갈등의 핵심은 ‘이미’(already·もはや)라는 단어에 압축돼 있다. 한국은 조문 속에 담긴 “(지난 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구절을 통해 ‘병합조약 등은 처음부터 불법·무효’였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데 견줘, 일본은 ‘이미’란 부사어를 통해 ‘원래는 합법·유효했지만,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건국 등으로 1965년 현재 무효가 됐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란 단어를 통해 양국이 영원히 공통의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성격 규정이라는 난제를 피해간 것이다.

당시 일본에선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일본이 식민지배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대신 일본 지식인 사회가 주목한 것은 한일협정의 군사적·국제적인 성격이었다. 역사학연구회가 발표한 성명의 핵심 주장도 결국 미·일의 지배계급이 한일협정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반인민적 군사체제를 강화하고, 일본 독점자본이 한국에 신식민주의적 진출을 할 길을 트고 있으며,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와다 명예교수도 “당시 일본 좌파는 이 조약이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같은 동북아시아조약기구(NEATO)로 가는 첫걸음으로 인식했다. 반면, 일반인들은 ‘일본의 패전을 조선인들은 기뻐했다. 그래서 괘씸하다’는 인식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 시민들 사이에선 “보쿠니 야루나라 보쿠니 구레”(박정희 대통령에게 청구권 자금을 줄 바엔, 그 돈을 차라리 나에게 달라는 의미)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53년 10월 한일회담 3차 회담 때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구보타 망언’(“일본이 진출하지 않았으면 (한국이) 러시아, 중국에 점령돼 더 비참해졌을 것”)이나 협상 타결 직전인 1965년 1월 공개된 ‘다카스기 발언’(“한국이 20년 더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면 좋았을 것”)은 조약을 가조인하기 위해 1965년 2월 방한한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상이 전한 사과 발언(“양국 간 오랜 역사 가운데 불행한 시기가 있었던 것은 실로 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보다 당시 일본 사회의 한국관을 더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원폭 투하와 뒤이은 패전으로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던 일본 사회에, ‘일본은 가해자이며 그 때문에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애초부터 설 자리가 없었던 셈이다.

■ 한국 민주화와 맞물린 사과

1965년 한일협정 이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여 고도성장의 길로 들어선다. 그로부터 1980년대 중반께까지 일본 사회가 한국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독재’와 ‘기생관광’으로 상징되는 어둡고 불결한 것이었다. 한국민주통일연합(한민통) 관련 간첩조작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재일 조선인인 김정사 ‘재일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회복을 쟁취하는 모임’ 이사장은 “당시 민족 차별로 여러 내적 고통을 겪고 있는 내 눈에도 김지하와 같은 훌륭한 시인을 형무소에 가둔 한국의 독재정권은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73년 8월 중앙정보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이 시작되고, 이는 1987년 6월 한국의 민주화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 위안부 문제 등 전후 보상 투쟁을 지원하는 흐름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사회 변화가 불러온 한-일 간 역사인식과 관련된 첫 성과는 일본이 전후 50년을 맞아 1995년에 내놓은 ‘무라야마 담화’였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은 국가정책을 그르쳐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무라야마 담화의 역사인식은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발표한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선 대상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국’으로 특정됐고,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지 100년이 되던 2010년 간 나오토 당시 총리가 발표한 ‘간 담화’에선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는 한층 진일보한 인식으로 발전했다.

■ 인식차 좁힐 끈질긴 노력 필요

문제는 이제부터다. 한국은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일본이 ‘간 담화’에서 다시 한발 더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여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데 견줘, 아베 정권은 오는 8월 공개하는 아베 담화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표현을 사실상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맞서고 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씩 차이를 좁혀온 양국 간 역사인식이 뒷걸음질을 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양국의 역사인식 차이를 어떻게 메울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첨예하게 갈려 있다.

첫번째 주장은 한일협정 개정론이다. 이를 주장하는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일기본조약 2조는 한-일 역사갈등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한-일 과거청산의 출발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식민지배를 ‘잘못’으로서 명확하게 자리매김하는 새 조약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견은 협정 보완론이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느닷없이 조약을 뒤엎는다는 것은 국제 관행으로 보면 엄청난 일이다. 실제 한-일 사이의 역사인식은 한일협정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많은 진화를 해왔다. 한국 사회가 아베 담화 등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대신 포스트 아베까지 염두에 둔 좀더 긴 시각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어찌됐든 한·일 두 나라는 현재 놓여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우호관계를 증진해 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양국 간의 역사인식 차이를 좁히기 위한 양국 사회의 끈질긴 노력이다. 오타 오사무 도시샤대 교수(일한협정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 공동대표)도 “2조 문제는 일본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개정이 어려운 문제다. 한·일의 시민사회가 아베 담화가 어떻게 나오는지와 관계없이 무라야마 담화 등에 나온 역사인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구체화한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기억을 둘러싼 장기간에 걸친 집요하고 면밀한 싸움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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