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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아시아 여성기금과 불가역적 최종합의는 하나”

등록 2016-03-11 22:30수정 2016-03-13 12:32

[토요판] 특집
서경식 교수 편지의 배경
“그것은, 예컨대 반성할 줄 모르는 상습 폭력범을 두고 그 가족이 피해자에게 ‘그

에게 근본적인 반성을 하라고 압박해봤자 무리”라면서 ‘그러니 포기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보내는 이 공개서한에 나오는 얘기다. 일본정부가 기획·추진한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에 앞장섰던 와다 교수를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이 한마디 비유는,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정상간에 교환된 이른바 ‘불가역적인 최종합의’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지금 일본의 위험한 반동적 우경화와 진보세력의 몰락, 파산한 한·일 연대와 뒤틀린 한일관계, 한미일 삼강동맹 움직임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 심리적·사상적 기저까지 드러내는 기막힌 우의일 수 있다. 나아가 지리멸렬한 한국 진보세력에 대한 경고이자 지독한 야유일 수도 있다.

와다 교수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군이 요청해서 조직적으로 만들어 관리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중대한 죄’임을 인정해 놓고도, 그것이 일본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임을 ‘법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모순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게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 옹호론의 근거였는데, 그 근거는 놀랍게도“일본과 독일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전후 독일은 나치와 단절한 국가여서 과거사를 반성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수 있었지만, 전쟁 전 군국주의체제 연속선상에 있는 전후 일본국가는 그럴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일본에겐 국가 차원의 전쟁범죄 인정과 배상을 요구하지 말고 그냥 참으면서 일본 정부 하자는 대로 하자, 이것이 와다 교수와 일본 진보세력 ’현실주의’의 본질이라고 서 교수는 지적한다.

더 나쁜 것은, 바로 그 패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현실주의’를 비판하는 한국의 정대협과 민주화운동세력의 여성기금 수용 거부논리를 역비판하는 와다 교수 등 일본 진보세력 일각의 뒤집힌(도착적) 도덕주의라고 서 교수는 얘기한다.

그 바탕에는 일본 진보세력의 ’원칙’을 포기한 ‘현실주의’가 실은 투항에 가까운 타협 내지 대세순응주의였으며, 1990년대 냉전붕괴 뒤 본색을 드러낸 투항주의는 결국 사회당과 진보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서 교수의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동서대립 시대의 종언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라는 천박한 구호와 함께 진보적 리버럴 세력의 자기해체라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 그때 늘 주고받은 상투어가 ‘시대는 변했다. 이젠 이데올로기 시대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진보세력이 스스로 탈이데올로기라며 이념이나 이상을 내버렸을 때 우파세력은 오히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채를 강화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 사회당도 진보세력도 몰락했다. 이후 일본의 리버럴 세력은 정치적 근거지를 잃었고, 그 때문에 안보법제, 원전 재가동 등 우파의 역행에 반대하는 국민의 절반을 대표할 정치세력이 없어졌다. 한국사정이 이와 얼마나 다를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서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등으로 일본에서 환영받고 있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 ‘박유하 현상’에 일조하고 있는 일본 진보세력(리버럴)의 뒤틀린 심리(심성)에서 그 원인의 일단을 찾는다.

“(‘박유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박유하의 언설이 일본 리버럴파의 숨겨진 욕구와 정확하게 합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는 반대하면서, 자신들을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우파와는 구별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 식민지배를 확대함으로써 획득한 일본국민의 국민적 특권이 위협받는 데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 우파와 일선을 긋는 일본 리버럴파 다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명예감정과 옛 종주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특권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방식이 “초기설정부터 잘못됐다”고 보는 서 교수의 지적은 이런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전후 일본의 번영을 뒷받침한 ’평화헌법’체제를 향유하면서도,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에 목숨을 잃은 수천만 아시아민중의 희생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일본 진보세력, 나아가 일본국민 대다수는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고 서 교수는 지적한다. 이는 미국이 주도한 동아시아 전후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서 교수가 자신의 ‘사상적 스승’이었던 와다 교수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일본 진보세력 비판임과 동시에 과거사 모순 위에 구축된 동아시아 전후체제와 뒤틀린 한일관계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문제제기로 읽을 수도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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