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근무를 위해 떠나는 외교관들은 옷가지에서부터 부엌살림에 이르기까지 세간살이 전부를 종이상자에 담아 이사 준비를 해야 한다. 서울세관 통관을 위해 대기 중인 해외 이삿짐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6) 외교관의 이삿짐
(6) 외교관의 이삿짐
외교관은 은퇴할 때까지 2~3년마다 국내 근무와 해외 근무를 되풀이하며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필자도 외교부에서 일했던 30년 동안 해외 근무를 한 게 7차례이니, 14차례 국제이사를 한 셈이다. 국제이사는 국내이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옷가지에서부터 부엌살림까지 세간살이 전부를 이사용 종이상자에 나눠 넣고 포장용 테이프로 단단히 밀봉하는데, 물건들을 가지런히 상자 크기에 맞추어 분류해 넣는 일이며 그릇이나 깨지는 물건을 종이나 뽁뽁이로 일일이 둘러싸는 일이 보통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가구나 가전제품같이 큼직한 물건들은 이삿짐 회사 직원들이 와서 포장을 해주지만,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짐들은 1~2주 전에 미리 종이상자를 받아놓고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서 직접 포장해야 한다.
집에서 내보낸 이삿짐은 컨테이너에 넣은 채로 선박에 실려 해외로 운송된다. 항구에 도착 후 트럭에 옮겨 육상으로 운송하므로 현지에서 다시 이삿짐을 받을 때까지 1~2개월이나 시간이 걸린다. 국내이사와 비교해서 제일 불편한 것이 바로 이 기간 동안 살림살이도 제대로 없이 생활해야 한다는 점이다. 집을 빌릴 때 기본 가구가 붙어 있는 나라는 괜찮지만, 덜렁 집만 빌려주는 나라에 부임하면 입주 뒤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밥을 먹을 식탁이나 앉을 의자도 없이 지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험지 부임할 땐 색연필·지우개까지 챙겨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부임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워낙 기후가 좋다는 곳이라 별생각 없이 여름옷만 몇 벌 준비해 갔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8월의 날씨가 뜻밖에도 꽤나 쌀쌀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내가 보낸 제일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었다’고 한 말이 딱 들어맞았다. 밤이면 기온이 더 내려가서 여름 옷차림으로 잠을 자기엔 너무 추웠다. 집을 계약하고 입주를 했지만 이삿짐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족들 모두가 가져온 여름옷을 몇 벌씩 겹쳐 입고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서 편하게 지내다가 이삿짐 도착 날짜에 맞추어서 입주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호텔 생활을 하는 동안은 식사를 해결하는 게 여간 문제가 아니다. 4~5인 가족이 매번 식당에 가서 사 먹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려니와, 무엇보다 집밥을 못 먹고 2~3주일 이상 지낸다는 것이 큰 고역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아이들의 학교 문제다. 일단 새 임지에 도착했으면 얼른 학교를 다니도록 해주어야 하는데 학교가 정해지지 않아 비좁은 호텔방에서 시간을 보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불편함이 있더라도 하루빨리 집을 구해서 입주하고 그 주소에 맞는 학군의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뒤돌아보면 역시 험지 근무 때의 생각이 많이 난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험지로 가게 되면 이삿짐을 꾸리는 것부터 큰일이다. 현지에는 워낙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근무하는 동안 사용할 물건을 꼼꼼히 준비해야 한다. 내가 1994년부터 2년간 근무했던 예멘은 아라비아반도의 최빈국으로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 같은 주변의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여건이 나빴다. 현지에 가면 뭐가 있고 뭐가 없는지, 빠뜨리지 말고 꼭 가져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리저리 수소문하며 정보를 파악했다.
물론 외교부에는 해외공관마다 부임자 안내자료라는 것이 있어서 직원들이 이사 준비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자료도 추가로 구해 보고 근무 경험이 있는 직원들로부터 조언도 구해야 한다. 1994년 당시는 인터넷도 제대로 보급되기 전이라 지금처럼 쉽게 현지 사정을 파악할 수 없었다. 사진이나 동영상은 더더욱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생생한 이미지를 눈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거리의 모습은 어떤지, 집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사람들은 어떤 차림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채로 가족을 데리고 험지 공관에 부임하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 심정인지,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유튜브로 동영상을 구하고 구글어스로 현지의 길거리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는 요즈음에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멘으로 이사 준비를 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생필품과 상비약이었다. 식품, 과자류와 식재료, 특히 한국 음식 만드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을 넉넉하게 구입했다. 현지에는 제대로 된 문구류를 구하기 힘들다고 해서 아이들이 쓸 색연필, 지우개에 투명테이프까지 바리바리 싸서 이삿짐에 넣었다. 믿고 갈 만한 병원도 없는데다 병원에 가더라도 의료용품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탈지면과 붕대, 반창고, 일회용 주사기까지 골고루 사서 상자에 담았다.
일단 아프지 않은 게 제일이고, 조금 아프더라도 가지고 간 비상약으로 때우겠다는 생각에 소화제, 감기약은 물론이고 진통제, 항생제까지 종류별로 꼼꼼하게 챙겼다. 항생제를 사려면 의사의 처방이 필요했는데, 당시 근무하던 도쿄의 한국대사관 근처에 단골 약국이 있어서 주인아저씨에게 예멘으로 간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처방전 없이 항생제 몇 종류를 겨우 구입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경험도 없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처음으로 험지에 부임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것저것 다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해 갔는데 나중에는 결국 과잉준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생활해보니 어디든 다 사람이 살게 되어 있는 법이고, 필요한 물건은 아쉬운 대로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준비해 간 것을 다 쓰지도 못한 채 2년 후 귀국할 때 다시 이삿짐에 넣어서 그대로 가지고 온 물건도 굉장히 많았다. 탈지면이며 붕대, 지우개, 투명테이프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그 후로도 몇 년 동안이나 사용했을 정도였다.
국내·해외 옮겨다니다 보니
이삿짐 도착 때까지 큰 불편
물자 부족한 험지 부임할 땐
생필품·의약품 등 꼼꼼히 챙겨
돌아올 때 다시 가져오기도 1994년 4월 부임한 예멘
도착 3주만에 남북 내전 시작
가족들 철수시키고 현지 남아
3개월 동안 이삿짐 풀지 못해
“내 인생 더 이상 이사는 없다” 내전 난 날 집에 도착한 이삿짐 예멘에 이삿짐이 도착하던 날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근무를 마치고 예멘의 한국대사관에 부임한 것이 1994년 4월 초순이었다. 전임자가 살던 주택을 그대로 승계했기 때문에 호텔 생활을 할 필요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인 가구와 부엌살림이 집에 딸려 있어서 이삿짐이 도착하기 전이라도 그런대로 생활할 만했다. 당시의 예멘은 1990년 5월에 남북 합의에 의해 통일된 지 4년이 되었을 무렵인데, 경제상황이 악화되는 등 통일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도 과거 남북 예멘의 군부대 지휘계통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터라 종종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내가 현지에 부임한 지 3주일 만에 마침내 남북 간에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5월5일 새벽 5시20분쯤 ‘쐐-액’ 하고 마치 비행기가 우리 집의 지붕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이어 콩 볶듯 찢어지는 대공포 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남예멘의 전투기가 수도 사나의 공항을 공습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침실에서 데리고 나와 집안 한가운데 있는 홀의 식탁 밑에 쪼그려 숨도록 했다. 우리가 입주한 집은 단독주택이어서 방마다 돌아가면서 바깥쪽으로 커다란 창문이 나 있었는데, 혹시라도 창문으로 날아들지 모르는 유탄이나 파편을 피하려면 창문에서 멀리 떨어진 한가운데의 홀이 제일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침대의 매트리스를 끌어다가 바리케이드처럼 식탁을 둘러쌌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총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네 명의 가족이 웅크리고 앉아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심조심 기다시피 하여 전화기로 다가가서 수화기를 들어보니 우리 대사관에서 일하는 현지 직원 자말이었다. 잠시 후 우리 집으로 올 테니 대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엉뚱하게도 내 이삿짐이 지금 도착해서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 자말이 내 이삿짐을 찾아서 트럭에 싣고 우리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집안에서 대답이 없기에 걸어서 5분 거리의 대사관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총소리가 시끄러운데다 집안 한가운데에 매트리스를 둘러치고 그 속에 숨어 있었으니 바깥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문을 열어주니 일꾼들이 총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100여개의 이삿짐 상자를 집안으로 옮겨놓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필이면 이런 날 이삿짐이 도착할 게 뭐람’ 하고 황당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래도 내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 집까지 이삿짐이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하루만 늦었더라면 내전의 와중에 항구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 위의 어디에선가 트럭이 발이 묶여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트럭에 실린 이삿짐도 이리저리 흩어져 실종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내전이 일어나고 닷새 만인 5월9일에 대사관 직원 가족과 현지 교민 25명을 프랑스 군용기 편으로 철수시키고 나를 포함한 대사관의 남자 직원들은 현지에 남았다.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도착한 이삿짐 상자를 함부로 뜯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혹시라도 전쟁이 악화되어서 나머지 인원까지 모두 철수하게 되면 이 짐들을 어떻게 다시 서울로 보낼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난감하기도 했다. 다행히 3개월 만에 내전이 끝나서 가족들이 다시 현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예멘에 근무하는 동안 아껴 먹으려고 종류별로 사서 이삿짐에 넣었던 라면을 내가 혼자 남아 있는 3개월 동안 야금야금 꺼내 먹은 것 말고는 이삿짐은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안에 쌓아둔 채 그대로였다. 퇴직한 뒤 처음으로 식탁과 소파 장만 국제이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삿짐 상자를 꾸리고 테이프를 붙이는 우리 부부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그에 비례해서 체력의 한계도 점점 더 절감하게 되었다. 3년쯤 전에 외교부를 퇴직하고 나서 바로 북한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는데, 그 집으로 살림살이를 옮기면서 앞으로 내 인생에 더 이상 이사는 없을 거라고 다짐을 했다. 식탁이며 소파 세트를 장만해 들여놓으면서 인생의 남은 시간 동안 이 물건들을 지금 놓아둔 이 자리에서 더는 옮기지 않고 그대로 쓰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흐뭇하기만 했다. 국내와 해외를 떠돌아야 하는 생활 때문에 결혼 후 한 번도 제대로 가구를 사본 일이 없었던 터라 더욱 각별한 느낌이었다. 근무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지난번 이사 때 가져왔던 것을 거의 손도 대지 않고 2~3년 동안 놔두었다가 그대로 다시 상자에 넣는 적도 많았다. 책이나 옛날 사진, 과거 근무지에서 샀던 자질구레한 기념품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중에는 이사 와서 아예 상자를 풀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내보내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다시 이삿짐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놓고 살고 있다. 새집에는 젊은 시절부터 벼르던 대로 방바닥에서 천장까지 꽉 차게 붙박이 책장을 짜 넣었다.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면서 해외로 떠도는 생활을 드디어 마감하고 한곳에 정착하게 되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중국·예멘·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
이삿짐 도착 때까지 큰 불편
물자 부족한 험지 부임할 땐
생필품·의약품 등 꼼꼼히 챙겨
돌아올 때 다시 가져오기도 1994년 4월 부임한 예멘
도착 3주만에 남북 내전 시작
가족들 철수시키고 현지 남아
3개월 동안 이삿짐 풀지 못해
“내 인생 더 이상 이사는 없다” 내전 난 날 집에 도착한 이삿짐 예멘에 이삿짐이 도착하던 날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근무를 마치고 예멘의 한국대사관에 부임한 것이 1994년 4월 초순이었다. 전임자가 살던 주택을 그대로 승계했기 때문에 호텔 생활을 할 필요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인 가구와 부엌살림이 집에 딸려 있어서 이삿짐이 도착하기 전이라도 그런대로 생활할 만했다. 당시의 예멘은 1990년 5월에 남북 합의에 의해 통일된 지 4년이 되었을 무렵인데, 경제상황이 악화되는 등 통일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도 과거 남북 예멘의 군부대 지휘계통이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터라 종종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내가 현지에 부임한 지 3주일 만에 마침내 남북 간에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5월5일 새벽 5시20분쯤 ‘쐐-액’ 하고 마치 비행기가 우리 집의 지붕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이어 콩 볶듯 찢어지는 대공포 소리가 사방을 뒤덮었다. 남예멘의 전투기가 수도 사나의 공항을 공습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침실에서 데리고 나와 집안 한가운데 있는 홀의 식탁 밑에 쪼그려 숨도록 했다. 우리가 입주한 집은 단독주택이어서 방마다 돌아가면서 바깥쪽으로 커다란 창문이 나 있었는데, 혹시라도 창문으로 날아들지 모르는 유탄이나 파편을 피하려면 창문에서 멀리 떨어진 한가운데의 홀이 제일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침대의 매트리스를 끌어다가 바리케이드처럼 식탁을 둘러쌌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총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네 명의 가족이 웅크리고 앉아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심조심 기다시피 하여 전화기로 다가가서 수화기를 들어보니 우리 대사관에서 일하는 현지 직원 자말이었다. 잠시 후 우리 집으로 올 테니 대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엉뚱하게도 내 이삿짐이 지금 도착해서 집 앞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 자말이 내 이삿짐을 찾아서 트럭에 싣고 우리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집안에서 대답이 없기에 걸어서 5분 거리의 대사관으로 가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총소리가 시끄러운데다 집안 한가운데에 매트리스를 둘러치고 그 속에 숨어 있었으니 바깥에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문을 열어주니 일꾼들이 총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100여개의 이삿짐 상자를 집안으로 옮겨놓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필이면 이런 날 이삿짐이 도착할 게 뭐람’ 하고 황당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래도 내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 집까지 이삿짐이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하루만 늦었더라면 내전의 와중에 항구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 위의 어디에선가 트럭이 발이 묶여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트럭에 실린 이삿짐도 이리저리 흩어져 실종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내전이 일어나고 닷새 만인 5월9일에 대사관 직원 가족과 현지 교민 25명을 프랑스 군용기 편으로 철수시키고 나를 포함한 대사관의 남자 직원들은 현지에 남았다.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도착한 이삿짐 상자를 함부로 뜯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혹시라도 전쟁이 악화되어서 나머지 인원까지 모두 철수하게 되면 이 짐들을 어떻게 다시 서울로 보낼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난감하기도 했다. 다행히 3개월 만에 내전이 끝나서 가족들이 다시 현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예멘에 근무하는 동안 아껴 먹으려고 종류별로 사서 이삿짐에 넣었던 라면을 내가 혼자 남아 있는 3개월 동안 야금야금 꺼내 먹은 것 말고는 이삿짐은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안에 쌓아둔 채 그대로였다. 퇴직한 뒤 처음으로 식탁과 소파 장만 국제이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삿짐 상자를 꾸리고 테이프를 붙이는 우리 부부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그에 비례해서 체력의 한계도 점점 더 절감하게 되었다. 3년쯤 전에 외교부를 퇴직하고 나서 바로 북한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는데, 그 집으로 살림살이를 옮기면서 앞으로 내 인생에 더 이상 이사는 없을 거라고 다짐을 했다. 식탁이며 소파 세트를 장만해 들여놓으면서 인생의 남은 시간 동안 이 물건들을 지금 놓아둔 이 자리에서 더는 옮기지 않고 그대로 쓰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흐뭇하기만 했다. 국내와 해외를 떠돌아야 하는 생활 때문에 결혼 후 한 번도 제대로 가구를 사본 일이 없었던 터라 더욱 각별한 느낌이었다. 근무지를 옮겨 다닐 때마다 지난번 이사 때 가져왔던 것을 거의 손도 대지 않고 2~3년 동안 놔두었다가 그대로 다시 상자에 넣는 적도 많았다. 책이나 옛날 사진, 과거 근무지에서 샀던 자질구레한 기념품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중에는 이사 와서 아예 상자를 풀지도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내보내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다시 이삿짐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 없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놓고 살고 있다. 새집에는 젊은 시절부터 벼르던 대로 방바닥에서 천장까지 꽉 차게 붙박이 책장을 짜 넣었다.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면서 해외로 떠도는 생활을 드디어 마감하고 한곳에 정착하게 되었음을 실감하고 있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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