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81년 취임 직후부터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군사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광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침략할지 모르기에 선제공격도 필요하다고 소련이 생각한다’는 미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를 본 뒤 상대방을 이해하게 됐다. 사진은 레이건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총서기가 1986년 10월11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3배가 넘는 폭탄이 투하됐고, 가장 많을 때는 54만명이나 되는 미군 병력이 투입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1965년에서 1968년 사이에 미국은 북베트남 측에 7차례나 물밑에서 비밀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문제는 북베트남과의 대화 채널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주재하던 야누시 레반도프스키 폴란드 대사는 업무상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할 일이 많았다. 폴란드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베트남 정부와 교류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충분히 중간에서 대화를 주선해 줄 수 있는 입장이었다. 1966년 11월 하노이를 방문한 레반도프스키 대사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평화협상 제안을 북베트남 측에 전달했고, 북베트남 측으로부터 폴란드의 중개 아래 바르샤바에서 미국과 직접 대화를 하겠다는 회답을 받아 사이공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마리골드 협상'이란 암호명의 비밀 평화협상이 시작됐다.
첫 번째 협상을 열기로 약속한 12월6일 미국 대표단은 바르샤바 시내의 폴란드 외교부 건물 내의 회의실에서 북베트남 대표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10분, 20분, 시곗바늘이 계속 돌아가는데도 북베트남 측은 나타나지 않았다. 1시간, 2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다 가도록 북베트남 대표단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결국 협상은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본 채 실패로 돌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고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던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가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년 만에 풀린 협상 무산의 비밀
전쟁 당사국들이 수십년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나 그때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서로 상대방의 생각과 의도를 확인해 볼 수 있다면 수많은 궁금증이 속 시원히 풀릴 것이다. 개인들 사이에서라면 몰라도 국가 간에는 좀처럼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작업을 미국과 베트남이 시도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22년이 지난 1997년 6월20일부터 3박4일 동안 하노이 중심부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양측의 전직 고위 관계자들이 모여 심포지엄을 열었던 것이다.
‘놓쳐버린 기회?’(Missed Opportunities?)라는 제목을 내건 이 심포지엄에는 미국과 베트남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과 응우옌꼬탁 전 외교차관을 대표로 전직 군인, 외교관, 학자 등 각각 13명이 참석했다.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현장의 전투를 지휘했던 과거의 적들이 한자리에 마주 앉아 전쟁 당시에 어떤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고, 상대의 의지와 목적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수백만명의 사망자를 낸 참혹한 전쟁을 처음부터 회피하거나 더 빨리 종결시킬 방법은 없었는지,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어떤 오해와 실수가 있었는지 솔직하게 묻고 대답했다.
폴란드 중재로 간신히 마련된
미-북베트남 1968년 비밀협상
장소 오해로 착수조차 못해
‘외교적 진실은 여럿’의 예
소련에 강경대응한 레이건
“소련이 ‘미국 전쟁광’ 겁낸다”는
CIA 보고서 본 뒤 태도 바꿔
협상하려면 상대 인정해야
심포지엄에서는 당연히 마리골드 협상도 화제에 올랐다. 베트남의 전직 외교관 응우옌딘프엉은 당시에 하노이의 외교부에 근무하다가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바르샤바로 출장을 갔었다고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는 협상 훈령을 적은 메모를 양복 안쪽에 실로 꿰매어 붙이고 출장길에 올랐을 정도로 상부로부터 비밀 유지에 각별히 유의하라는 엄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북베트남 대표단은 12월6일에 바르샤바의 북베트남 대사관 리셉션룸에서 회담 자료를 잔뜩 쌓아놓고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도 미국 대표단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노이로 철수했다고 밝혔다.
이 말이 나오자 회의장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12월6일에 하루 종일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양측 대표단은 그 후 20년이 넘도록 계속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시 무언가 알 수 없는 착오로 인해 양측이 폴란드 외교부와 북베트남 대사관에서 각각 따로 상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팩트는 과연 하나인가?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외교에서 팩트는 하나가 아닌 경우가 많다. 마리골드 협상에서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상대방을 기다리던 미국과 베트남은 협상이 깨진 원인에 대해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같은 일을 두고도 내가 생각하는 팩트가 있고, 동시에 상대방이 생각하는 또 다른 팩트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돌아보고 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보고를 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일본의 실권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상에 대해서조차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의 눈이 쥐눈처럼 생겨서 두려워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민감한 외교 정세에 대한 두 사람의 판단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2013년 6월7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서니랜즈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회담이 끝난 후 북한 핵문제에 관해 미국 측은 핵확산 능력 억제를 위해 지속적으로 북한을 압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 측은 대북 제재에 대한 언급은 없이 빠른 시일 내에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며 북-미 간에 긴밀한 대화와 협력이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브리핑했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측의 설명이 서로 달랐지만 그렇다고 어느 쪽이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서로 입장이 다르고 강조하고 싶은 점이 달랐을 뿐이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은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1966년 폴란드의 중재로 마련된 바르샤바 비밀 협상은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운 채 끝나고 말았다. 당시 양국 협상단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20년 뒤에 밝혀졌다. 사진은 1966년 베트남 484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서 부상당한 미국 병사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외교문서 ‘마사지’하기도
외교관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해외에서 그 나라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국가정책과 여론 형성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면담하고 참고가 될 만한 대화 내용을 본부에 보고하는 일이다. 면담에서 상대방으로부터 한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이 나오더라도 빼놓지 않고 모두 보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대북정책을 비롯하여 대통령이 직접 이끌어가는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고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남발하며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을 훼손하는 독재정치를 하고 있을 때를 생각해 보자. 해외에 근무하고 있는 한국 외교관이 주재국의 중요 인물을 만나서 대화하던 중에 상대방으로부터 한국에서 인권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재국 정부의 대한국 정책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면담을 마치고 대사관으로 돌아온 그는 본부에 보고할 전문을 작성하면서 상대방이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독재정치를 비판한 내용을 그대로 포함시킬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이야기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전문에 적어서 보냈다가는 보고 전문을 받아본 외교부 간부나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로부터 ‘이 사람 본부 분위기 잘 알면서 눈치 없이 왜 이래?' 하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때로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이나 정부의 국정이념에 대해 투철한 의식이 없는 공무원으로 비난받거나 충성심과 애국심이 의심스럽다는 지적까지 받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부담감 때문에 보고서 내용을 본부의 입맛에 맞도록 윤색하거나 본부가 듣기 거북한 부분을 일부러 누락시키는 것을 ‘마사지'라고 한다. 외교관들이 현장에서 보고서 내용을 마사지하는 풍조가 일상화되다 보면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정보 보고는 점점 더 들어오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중요한 정책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조선통신사 황윤길 일행이 귀국할 때 일본에서 따라온 승려 겐소를 접대한 선위사 오억령은 겐소로부터 내년에 도요토미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조정에 올렸다. 당시 일본의 침공 가능성이 적다는 쪽으로 기울어있던 조정은 보고 내용을 귀중한 참고 자료로 삼기는커녕 이를 해괴하게 여기고 오억령을 경질 처분했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모양이다.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의 후회
팩트가 하나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볼 수 있고, 상대방의 시각에도 내 것에 못지않은 나름의 합리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외교협상이 가능하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1년 취임 직후부터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하며 강경한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호전적인 소련이 실제로는 미국으로부터 침공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며, 특히 레이건에 대해서는 선제공격도 마다하지 않을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를 읽고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소련을 전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소련도 자신에 대해 똑같이 전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레이건은 1984년 1월 연설에서 “우리가 다른 체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화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핵무기 시대를 살아나가려면 반드시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소련에 대한 자세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하노이 심포지엄을 실현시킨 맥나마라는 1961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7년 동안 국방장관으로 재임했던 인물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가 훗날 베트남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한 데 대해 미국 사회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심포지엄 추진 과정에서 13개 단체에 자금 지원을 신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퇴역군인 단체의 반발 때문에 군 출신 참석자를 섭외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맥나마라가 굳이 치욕스런 패배의 기억을 되살려가면서까지 과거의 적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그는 4일 동안의 회의를 통해서 서로 상대방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으며,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대화를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측의 한 참석자 역시 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러지 못해 후회스럽다고 고백했다. 북한 핵 미사일 문제를 둘러싸고 끝없는 상호불신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모든 당사국들이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심포지엄을 끝내면서 맥나마라가 지금 미국은 이슬람 사회를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1997년의 시점에서 마치 20년 후 2017년의 현실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듯한 놀라운 혜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