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이 본격화된 1980년대부터 중국의 지도자들도 국제 외교무대에서 인민복 대신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진핑 시대 들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상징한다며 다시 인민복 차림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있다. 지난해 10월 영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인민복 차림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건배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7) 외교관과 복장
(7) 외교관과 복장
1980년대 초반에 외교부(당시에는 외무부)에 들어와 국립외교원(당시에는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신규채용 직원 연수를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짙은 감색 양복바지와 검은 구두에 흰색 면양말을 종종 신고 다녔다. 그것이 촌스럽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깔끔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연수 과정에서 이것저것 배워보니 국제 매너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경우가 양복바지에 흰 양말 차림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창피하지만 그때 처음 양복 정장 차림에는 짙은 색의 양말이 예의에 맞는다는 걸 알았다.
그때 함께 연수를 받던 교육생 가운데는 대학 졸업 후 몇 개월 먼저 외교부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연수를 받으러 온 경우도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하루는 싱글 정장이 아니라 콤비재킷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사무실의 고참 선배 사무관으로부터 ‘여기는 콤비 입고 일하는 곳이 아니야’라고 한마디 들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외교부에서 콤비를 입을 일은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여름에도 긴팔셔츠 입던 외교부 직원
연수를 마치고 정식으로 일하면서 보니 외교부에서는 여름철에도 양복 안에 반팔 와이셔츠가 아니라 긴팔 와이셔츠를 입는 것이 보이지 않는 관례인 것 같았다. 한여름에 광화문 정부청사의 엘리베이터를 타 보면 타부처 공무원들은 반팔 와이셔츠가 대부분인데 그중에 긴팔 차림이 있다 싶으면 그건 십중팔구 외교부 직원임에 틀림없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무슨 외국물 먹은 티를 내는 거냐고 언짢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그래도 우리가 국제신사인데 복장만큼은 자존심을 지켜야지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최근에는 여름철 에너지 절약의 목적도 있고 해서 노타이의 간소복 차림이 공무원의 정식 근무 복장으로 허용된다. 정치인이나 장차관들도 회의 때 노타이 차림으로 참석하는 모습이 티브이(TV) 화면에 많이 나올 정도로 복장에 대한 통념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외교부에서도 콤비재킷 차림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되었고 젊은 직원들은 공무원 복장 간소화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편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많이 한다. 여름철의 긴팔 와이셔츠 문화도 바뀌어서 나도 과장 시절에 외교부 들어와서 처음으로 반팔 와이셔츠와 남방을 사서 입고 출근했었다.
외교관이라고 하면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요즘 같은 격식 파괴의 시대에 아직도 공사, 참사관, 1등서기관 하며 19세기 초에 확립된 계급에 따라서, 그리고 몇 백년 동안 관례로 정착되어 온 전통을 바탕으로 일하고 있다. 오찬·만찬 등의 연회나 공식 외교행사에서는 당연히 국제관례에 따라 격식을 갖춘 복장을 한다. 양복 차림으로 일상 업무를 할 때도 외교관의 복장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외교관들의 복장 문화도 변하고 있다.
1994년 중동의 예멘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예멘에 주재하는 각국의 대사관에서 정치업무를 담당하는 외교관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친교를 나누는 ‘사나 정무 담당관 클럽’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수도인 사나의 시내조차 도로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어딜 가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 벽촌 같은 곳이지만, 그래도 외교관들이 모이는 자리라서 모두들 싱글 정장 차림으로 참석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미국대사관의 젊은 2등서기관이 짙은 남색 양복 상의에다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때만 해도 아직 캐주얼 차림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명색이 외교관인데 저런 복장을 해도 되나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부터 이미 외교관들 사이에도 복장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2010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당시)은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21세기의 미국 외교관들은 상대국 외교부의 담당관들만 상대할 게 아니라 시골의 촌장 어르신도 만나야 하고, 양복 정장만 입을 게 아니라 카고 팬츠(건빵바지)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는 공공외교를 하려면 과감하게 격식을 벗어던지고 보통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외교관들이 옷차림에서도 점잖고 보수적인 전통을 무조건 고수할 수만은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외교관들이 격식을 갖춘 옷차림을 할 일이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외국에 대사를 파견할 때 파견국의 국가원수는 이 사람을 특별히 신임하여 대사로 파견하니 그가 나라를 대표하여 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하여 달라는 내용의 신임장을 주어서 보낸다. 현지에 부임한 대사는 외교사절로서의 임무를 정식으로 시작하기 위해 접수국의 국가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출한다. 이를 신임장 제정식이라고 하는데 외교 현장에서는 가장 격식 있는 행사 중의 하나다.
신임장 제정식의 복장은 평복(양복 정장)이 대부분이지만,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기 때문에 모닝코트나 연미복과 같은 예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외교관도 경력이 쌓여 대사로 해외에 부임할 즈음에는 예복 한 벌쯤은 마련해서 나갔다고 들었다. 요즈음은 예복을 입을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에는 현지의 예복 대여점에서 잠시 빌려 입는 것이 보통이다.
콤비마저 금지하는 보수적 전통
공식 행사 국제관례 복장 갖춰야
공공외교 중요성 커지는 추세
격식 파괴하려는 움직임 일고
한복 차림 외교관 사례도 잇달아 “턱시도·연미복은 부르주아 상징”
공식만찬에 인민복 입은 장쩌민에
일본 여론 따가운 시선 보내기도
시진핑도 미·영 만찬 인민복 차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내세워 모닝코트 차림에 마차 타고 이동 입헌군주국 가운데는 신임장 제정식 때 외국 대사와 수행원 일행을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에 태워서 왕궁 내의 행사장까지 입장하게 하는 나라도 있다.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일본이 그런 경우인데, 유럽 궁정외교 시대의 모습을 화려하게 재현한 고풍스러운 마차에다, 마부와 시종들도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옛날 복장을 하고 등장한다. 내가 2008년 5월 권철현 주일본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을 때, 생전 처음으로 모닝코트를 빌려 입고 일행과 함께 3대의 마차에 분승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거리는 불과 2㎞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나가던 일본인 행인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이 우리가 예복 차림으로 마차를 타고 내리는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로 찍었다.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하는 대사가 자기 나라의 전통복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중동이나 동남아의 대사들이 전통복장을 많이 착용한다. 최근에는 한국 대사들이 외국에 부임하여 신임장을 제정할 때 한복을 입는 경우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2011년 7월 신각수 주일본 대사가 한복 차림으로 신임장을 제정할 때는 나도 수행원으로 참석했는데, 한-일 관계의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니 한복 차림이 주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언론보도를 검색해 보니 그 후에도 2015년 6월에 조대식 주캐나다 대사가 한복을 입고 신임장을 제정했다. 최근에는 테헤란에서 개최된 한-이란 문화공동위원회에 참석한 외교부의 선승혜 문화교류협력과장이 한복에 조바위 차림으로 회의에 나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 외교관들은 외교행사에 참석할 때 배우자가 한복을 입는 일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이 한복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앞으로는 한국 외교관의 한복 차림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옷차림 때문에 외교적으로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은 1998년 11월에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때 아키히토 일왕 주최 국빈만찬에 인민복(중산복)을 입고 참석해서 일본 국내 여론으로부터 큰 반발을 초래했다. 물론 일본 측이 반발한 주된 이유는 장 주석이 만찬사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지만 인민복 차림에 대한 거부감도 그에 못지않았다.
일본에서 국빈만찬은 턱시도를 입는 것이 의전상의 관례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턱시도나 연미복과 같은 서양식 예복은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착용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관례이다. 따라서 주최 측이 턱시도를 입더라도 자신들은 평복인 양복을 입는다.
그런데 왜 장쩌민 주석은 굳이 인민복을 입었던 것일까? 중국의 입장에서는 인민복이 양복보다 더 격식 있는 복장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입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 주석이 다른 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양복을 많이 입었고, 그의 후임자인 후진타오 주석이 2008년 5월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국빈만찬에서 양복을 입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장쩌민 주석보다 한 달 앞서 1998년 10월에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솔직하고 분명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고 양국 정상이 공동선언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까지 했기 때문에 한-일 관계의 커다란 진전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성과를 지켜본 중국은 뒤늦게 장 주석의 방일 때 채택할 중-일 공동선언에도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포함시키고 서명까지 하자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부치 총리는 한국과 중국은 경우가 다르다며 중국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장쩌민 주석의 불만이 인민복 차림으로 표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래는 김대중 대통령보다 장쩌민 주석이 한 달 먼저 9월에 일본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 중국에 대홍수가 발생해서 장 주석의 방일이 11월로 연기되는 바람에 순서가 바뀌어 김 대통령이 먼저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예정대로 장 주석이 먼저 방일했으면 중국 측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신경 쓸 일도 없었을 것이고, 중·일 양국 간의 방일 준비 작업도 원만히 진행되어 인민복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민복만 고집했던 덩샤오핑
장쩌민 주석의 인민복 차림에 중국 측의 특별한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 측의 반발은 오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어떤 사건의 실제 의도에 못지않게 그로 인해 당사자들이 갖게 된 인식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장 주석이 인민복을 입고 국빈만찬에서 만찬사를 읽는 장면은 1990년대 중반부터 중-일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는 현상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이미 일본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문제는 앞으로 시진핑 주석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면 또 한 번 인민복을 둘러싼 소동이 재연될 것 같다는 점이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미국과 영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만찬에서 인민복을 입었다.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1980년대부터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그 이전과는 달리 국제 외교무대에서 인민복이 아닌 양복을 입었는데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시진핑의 인민복은 그가 내세우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상징한다. 중국의 자기주장이 강하게 담겨 있는 복장인 만큼 이에 대해 일본이 갖게 되는 인식은 불편한 것일 수밖에 없다.
1978년 10월에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8일간의 체제 기간 동안 모든 행사에 인민복을 입고 참석했다. 그런데도 당시의 일본 여론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덩샤오핑의 방일을 환영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중국·예멘·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
공식 행사 국제관례 복장 갖춰야
공공외교 중요성 커지는 추세
격식 파괴하려는 움직임 일고
한복 차림 외교관 사례도 잇달아 “턱시도·연미복은 부르주아 상징”
공식만찬에 인민복 입은 장쩌민에
일본 여론 따가운 시선 보내기도
시진핑도 미·영 만찬 인민복 차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내세워 모닝코트 차림에 마차 타고 이동 입헌군주국 가운데는 신임장 제정식 때 외국 대사와 수행원 일행을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에 태워서 왕궁 내의 행사장까지 입장하게 하는 나라도 있다.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일본이 그런 경우인데, 유럽 궁정외교 시대의 모습을 화려하게 재현한 고풍스러운 마차에다, 마부와 시종들도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옛날 복장을 하고 등장한다. 내가 2008년 5월 권철현 주일본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 수행원으로 참석했을 때, 생전 처음으로 모닝코트를 빌려 입고 일행과 함께 3대의 마차에 분승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거리는 불과 2㎞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나가던 일본인 행인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이 우리가 예복 차림으로 마차를 타고 내리는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로 찍었다.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하는 대사가 자기 나라의 전통복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중동이나 동남아의 대사들이 전통복장을 많이 착용한다. 최근에는 한국 대사들이 외국에 부임하여 신임장을 제정할 때 한복을 입는 경우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2011년 7월 신각수 주일본 대사가 한복 차림으로 신임장을 제정할 때는 나도 수행원으로 참석했는데, 한-일 관계의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니 한복 차림이 주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언론보도를 검색해 보니 그 후에도 2015년 6월에 조대식 주캐나다 대사가 한복을 입고 신임장을 제정했다. 최근에는 테헤란에서 개최된 한-이란 문화공동위원회에 참석한 외교부의 선승혜 문화교류협력과장이 한복에 조바위 차림으로 회의에 나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 외교관들은 외교행사에 참석할 때 배우자가 한복을 입는 일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이 한복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앞으로는 한국 외교관의 한복 차림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1998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당시)은 인민복을 입고 일왕 주최 공식만찬에 참석했다가 일본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AP 연합뉴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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