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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동독 외교관 4명만 통일 뒤 일자리 지켰다

등록 2016-09-09 19:58수정 2016-09-09 20:16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14) 통일과 외교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1889년부터 자주 외교의 무대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건물 관리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2012년 문화제청이 사들였다. 문화재청 제공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1889년부터 자주 외교의 무대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건물 관리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2012년 문화제청이 사들였다. 문화재청 제공

‘외교관이 시골 빵집 주인이 되었다.’ 요즘이야 외교관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직업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드물지도 않으니 시골 빵집 주인이 되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나의 외교부 시절 가까운 후배 중 한 사람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임원으로 변신해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특이하게도 우동 전문점의 사장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외교관으로서도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던 터라 새로운 분야에서 더욱 크게 활약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외교관이 시골 빵집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면 누군가 또 외교부를 그만두고 새 길에 도전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1990년 10월3일 독일이 통일된 뒤에 동독의 외교관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소개한 일본 언론의 특집 기사에 나온 이야기다.

독일 통일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에 취재팀이 통일 당시 도쿄의 주일 동독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했던 동독 외교관 A씨를 찾아갔다. A씨는 자신의 고향인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취재팀이 도착하자 빵을 사러 온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던 A씨는 취재팀을 가게의 한쪽으로 이어진 자택의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로 들어서서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니 A씨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외교행사에 참석했던 사진들이 화려했던 외교관 시절의 모습을 쓸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통일 전까지만 해도 조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해외를 오가면서 활약했지만 통일 후에는 더 이상 외교관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와 작은 빵집을 열게 된 A씨의 심경이 어땠을까.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이루어졌는데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동독 외교관의 처지가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통일 뒤 실직 내몰린 동독 외교관

독일 통일은 사실상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형태였기 때문에 동독의 공무원은 고용 승계가 보장되지 않았다. 고위직은 통일과 함께 즉시 해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중하위직은 일단 대기발령을 받은 후 일정한 기간 안에 재임용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해고되었다. 당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동독의 공무원 중 해고되는 인원이 65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통일이 되어 국토와 인구가 늘어나면 행정업무도 덩달아 늘어나게 되는 분야가 있다. 교육, 의료, 치안과 같은 분야가 대표적인데 동독의 공무원 중에도 교사나 의사, 경찰, 소방관들은 통일 후에도 공무원으로 재임용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그러나 외교 분야는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인원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크지 않았고, 동독 외교관들은 거의 모두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독 외교부는 통일을 앞두고 해외에 주재하는 자국의 외교관 전원에게 9월28일부로 공식 업무를 종료하고 해외공관의 모든 재산과 업무를 현지의 서독대사관에 인계한 후 10월3일까지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동독이 해외의 80여개국에 소유하고 있던 대사관과 영사관 등 118건의 건물과 토지, 2070건의 주택에 대한 인수인계를 위해 현지에는 잔무처리 직원 1명만을 임시로 남겨두도록 했다.

동독 외교부에는 외교직과 일반직을 포함하여 2000명이 넘는 외교관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대사를 포함한 과장급 이상의 외교관은 10월3일부로 면직 처리되었고, 나머지 직원들은 6개월의 시한부 대기발령을 받았다. 2009년에 제작된 독일의 다큐멘터리 <라이프 비하인드 더 월>(Life Behind the Wall: East Germany's Final Year)에 의하면 동독 외교부 직원 가운데 통일 후 재임용된 경우는 겨우 4명뿐이었다.

해외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외교관을 뽑을 때는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을 중시한다. 서독과 치열한 체제 경쟁을 벌였던 동독의 외교관은 거의 전원이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엘리트 당원으로 충원되었다. 이처럼 공산주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집단에 속했던 동독 외교관들을 서독의 입장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독은 일찍이 1969년부터 동독을 포용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했고 통일 직전에는 양측 주민들의 상호방문 규모가 매년 1000만명을 넘을 정도로 동독과 다양한 교류협력의 실적을 쌓아왔다. 그런데도 외교 분야의 통합에서만큼은 이처럼 냉정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라면 군인도 외교관에 못지않다. 그러나 통일 과정에서 동독 외교관들이 대부분 실직한 것과는 달리 동독의 군인은 상당수가 구제되었다. 17만명 규모이던 동독군 병력 가운데 약 5만명이 통일독일군으로 편입되었다. 군 장성들은 전원 예편되었지만 전투기 조종사와 같이 특수한 기술을 보유한 직업군인들은 4000명 이상 재임용되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순위 2위에 오를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던 동독의 스포츠 지도자들이 통일 직후 외국팀으로 영입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군인들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재취업에 유리했던 것 같다.

반면에 외교관은 특별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그다지 뚜렷한 기술이 없는지도 모른다. 외국어 실력이나 외국에 대한 지식, 국제적인 업무 경험과 같이 예전에는 외교관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분야에서 이제는 민간인들도 외교관에 못지않은 전문성을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민간의 전문가가 외교관으로 특채되어 실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통일 후 실직의 위기를 맞은 동독의 외교관들이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는 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독, 2000명 넘는 외교관 활동
사회주의통일당 엘리트 당원 출신
통일되자 해외공관 서독에 넘기고
과장급 이상은 즉시 전원 면직

한국, 을사늑약 때 해외공관 뺏겨
귀국 거부하고 자결·망명하기도
합의에 의한 통일 이룬 예멘에선
대량 감원 없이 대부분 고용승계

1990년 10월3일 동독과 서독의 통일 협정이 조인되자 수많은 베를린 시민이 양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모여들어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독일 통일 이후 동독의 공무원들, 특히 외교관들은 거의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AFP 연합뉴스
1990년 10월3일 동독과 서독의 통일 협정이 조인되자 수많은 베를린 시민이 양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문 앞으로 모여들어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독일 통일 이후 동독의 공무원들, 특히 외교관들은 거의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AFP 연합뉴스

주영 공사서리, 조선 주권 외치다 자결

같은 민족이 통일을 이룬 경우가 이렇다면 다른 나라에 국권을 빼앗겨서 아예 국가가 없어진 경우의 외교관이란 얼마나 더 비참할까. 조선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5년 전인 1905년 11월17일에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으로 외교권부터 먼저 빼앗겼다. 그 전해인 1904년 8월22일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에서 모든 외교 문제는 일본과 사전에 협의하여 처리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외교권의 박탈은 1년 이상의 치밀한 준비기간을 거쳐 진행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주영국공사관의 이한응 공사서리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조선의 주권 보전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5년 5월12일 32살의 나이로 현지에서 자결했다. 일본의 외교권 침탈에 항거하여 순국한 최초의 외교관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해외에 주재하던 조선의 외교관들은 통일 후 동독 외교관이 그랬던 것처럼 해외공관과 모든 업무를 현지의 일본 공관에 인계하고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범진 주러시아공사 같은 인물은 귀국을 거부하고 러시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개탄하며 1911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와는 반대로 김윤정 주미공사는 신속하게 공사관을 일본에 인계하는 등 적극적인 협조 자세를 보였고, 일제 강점기에 외교관의 경력을 살릴 수는 없었더라도 충청북도 지사와 중추원 참의로 중용됐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출신도 필요하면 더러 공직에 임명했고 홍사익 중장처럼 일본 육군의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도 있었으나 외교 분야에서는 그런 사례가 없는 것을 보면 역시 외교관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든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것 같다.

외교권 박탈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40년간은 외교관이 되기를 꿈꾸는 조선의 젊은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꿈을 이루기는 불가능한 시대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그런 불행이 사라졌지만 한국 국적을 가지고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들에게는 아직도 비슷한 고민이 남아 있다. 재일한국인은 영주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교사나 지방공무원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국가공무원은 일본 국적이 요구되기 때문에 만일 외교관이 되고 싶다면 한국의 외교관 선발 시험에 도전해야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재일한국인이 모국으로 유학을 와서 공부하고 외교관 시험까지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익숙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재일한국인 젊은이들 중에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흥미를 느끼더라도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꿈을 접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하고 안타깝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최근에 언론보도를 통해 한솥도시락의 이영덕 회장이 외교관을 꿈꾸던 재일한국인 2세임을 알게 되었다. 이 회장은 나중에 궤도를 수정하여 사업가의 길을 걸었지만, 외교관이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1960년대 말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던 모국 유학이라는 커다란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통일 이야기가 나오면 독일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예멘이다. 나는 남북예멘이 통일된 지 4년 뒤인 1994년 4월에 예멘의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부임해서 2년 동안 근무했다. 당시 예멘은 통일의 후유증에다 제1차 걸프전쟁에서 미국의 군사개입에 반대한 데 대한 국제적 제재까지 더해져서 심각한 경제난과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가 어떤 프로젝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실력자를 잘 알고 있으니 한국의 투자자를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뿐이었다. 마치 모든 예멘 사람들이 브로커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 같았고 사회 전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남북예멘, 합의 원칙 살려 각료직 분배

남북예멘은 독일과는 달리 대등한 합의에 의해서 통일을 달성했다. 북예멘 대통령이 통일정부의 대통령을 맡았고 남예멘의 집권당 서기장이 부통령이 되었다. 각료직은 남북 간에 비슷한 숫자로 분배되었고, 장관이 북예멘 출신이면 차관은 남예멘 출신, 반대로 장관이 남예멘 출신이면 차관은 북예멘 출신을 임명하는 식으로 남북이 권력을 공유했다. 통합이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방법이었지만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어 건설부에서 남예멘 지역에 대규모 댐 건설 계획을 세우면 남예멘 출신 차관까지는 일사천리로 통과되는데 북예멘 출신 장관이 좀처럼 결재를 해주지 않아서 사업이 진척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합의 통일의 형태였기 때문에 공무원의 대량 감원도 없었고 남북 양측의 공무원은 거의 전원이 그대로 통일 예멘의 공무원이 되었다. 외교부의 경우에도 남북의 외교부가 그대로 통합되어 직원의 숫자는 크게 늘었지만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외교업무가 두 배로 늘어날 리는 만무했다. 사무실이나 새로운 업무를 배당받지 못해서 아예 출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했지만 이들에게도 월급은 꼬박꼬박 지급해야 했다. 업무의 효율성은 오히려 예전보다 떨어졌는데 정부의 재정 부담만 늘어난 셈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직장과 사회의 기강이 크게 해이해졌다는 점이었다. 출근하지 않는 직원들 중에는 공공연하게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했다. 예멘의 외교관은 통일의 과정에서 동독의 외교관이 겪었던 고통은 피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행운이 결과적으로 통일 예멘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우리가 통일되는 과정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애환이 교차하게 될까. 통일이란 외교관들에게 복잡한 상념을 갖게 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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