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스사이공>에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1975년 4월30일 함락당할 때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94년 5월9일 오전 11시. 한국인 25명을 태운 프랑스 공군의 C-130 수송기가 사나 국제공항을 이륙했다. 내전이 벌어진 예멘을 탈출하는 대사관 직원 가족들과 현지의 한국 교민들이 내전 발생 5일 만에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전쟁으로 이미 폐쇄된 사나 공항에는 예멘의 공무원이나 항공사 직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행복 차림의 프랑스 군인들이 명단을 확인하면서 피난민들을 탑승시키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 부인들은 현지에 남기로 한 남편들과 출국장에서 작별을 하고 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활주로로 향했다. C-130의 거대한 동체는 악어가 입을 벌리듯 꼬리 부분의 바닥을 활주로까지 비스듬히 내려놓았다. 여객기와 달리 기내는 철제 뼈대가 군데군데 드러나 있고 천장에는 파이프들이 그대로 노출된 살풍경한 느낌이었다. 기체의 벽면을 따라서 양쪽으로 붙어 있는 좁은 간이의자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륙을 위해 엔진의 회전수를 높이자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이 기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린 남자아이가 놀라서 자지러지듯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엄마가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엄청난 엔진 소리에 묻혀버렸다. 드디어 예멘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이 느껴질 법도 했으나, 지난 며칠 동안의 혼란스러웠던 체험들이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C-130은 홍해를 건너 약 500㎞ 떨어진 아프리카 동부 아덴만에 있는 작은 나라 지부티의 프랑스군 기지에 착륙했다.
기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일행은 시내의 호텔로 이동했다. 지부티의 모든 호텔은 예멘으로부터 철수한 외국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미처 객실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호텔 로비에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쪽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현지에서 한국 명예영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부티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객실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지에 한국대사관이나 총영사관이 없어서 걱정을 했는데 명예영사의 덕을 크게 본 셈이었다. 일행 25명은 다음날 에어프랑스 여객기 편으로 파리를 거쳐 5월12일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2009년 3월15일 예멘에서 폭발사고로 한국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튿날 외교통상부 재외국민보호과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전쟁 등 재난시에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외교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한겨레> 자료사진
외교관 대면조차 피하는 우방
내전이 발생한 뒤 가족과 교민들을 철수시킬 때까지의 닷새는 나의 30년 외교관 생활 가운데 가장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 있다. 주요국들이 자국민 철수를 시작하자 우리도 일찌감치 철수 방침을 정했지만 민간 여객기 운항이 중단된 상황이라서 항공편 마련이 문제였다. 예멘 외교부를 찾아가서 이야기해봤으나, 내전으로 자기 코가 석자인 형편에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국에서 군용기를 파견해 자국민을 철수시키고 있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대사관을 찾아가서 협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각자의 채널을 총동원했다. 예멘에 부임한 지 3주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현지의 외교관들과 제대로 안면도 트지 못한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철수시켜야 할 25명의 명단을 손에 들고 이 대사관에서 저 대사관으로 무작정 뛰어다녀야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 등 7개국의 대사관을 돌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우선 자기 국민부터 모두 철수시키고 난 후에나 외국인의 수송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제 관례상 당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가져간 명단을 건네주면서 나중에라도 꼭 탑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일면식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갔는데 바쁜 시간을 쪼개서 만나주는 사람은 고맙기 그지없었다. 반면에 대사관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도 외출중이라고 핑계를 대며 정문에서 들여보내주지도 않을 때는 부아가 치밀었다. 전화를 걸면 비서를 시켜 30분 후에, 다시 1시간 후 전화해 달라고 하며 이리저리 피하는 경우에는 야속하기만 했다. 우리도 그들처럼 직접 군용기나 전세기를 보내서 보란 듯이 자국민을 철수시켜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91년 소말리아 반군 수도 진격
북 대사관 폭도 습격 받아 위기
한국 대사관을 피난처로 제공
탈출 항공에 북 동포도 태워줘
재난때 교민 철수는 첫째 과제
예멘 내전때 교민 25명 철수령
독자 수단 없어 미국 등에 애걸
프랑스 호의로 막판 탈출 성공
4일째 되던 날도 하루 종일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특히 철수인원이 많아서 하루에도 여러 대의 군용기를 투입하고 있는 미국 대사관에 대해서는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탑승이 어렵다는 대답뿐이었다. 서울의 외교부 본부가 워싱턴의 주미대사관을 통해서 미국 정부에 각별히 협조를 요청해 놓았다고 하는데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미국이 이 정도이니 규모가 작은 다른 대사관에서 도와줄 가능성은 더 적을 것 같아서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그날의 일기에는 ‘프랑스 대사관을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철수 대상자 명단을 건네주었는데 그것을 받아드는 상대방의 표정에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그 사람의 얼굴조차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절실한 순간의 도움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으로부터 오는 법이라고 했던가. 저녁 6시쯤 프랑스 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에 태워줄 테니 아침 6시 반까지 25명을 데리고 대사관으로 오라는 것이 아닌가. 그날 오후 프랑스 대사관에서의 불쾌했던 기억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워낙 여기저기 부탁을 하고 다녀서인지 이탈리아 대사관의 담당자까지 일부러 전화를 해서 내일 프랑스 대사관이 한국인 철수를 맡기로 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고마웠다. 직원 가족들과 교민들에게 아침 일찍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해놓고 본부에도 전화로 보고를 했다. 며칠 동안 혼란이 계속된 상황이라 정말 예정대로 철수하게 되는 걸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밤 11시 반쯤 본부로부터 프랑스 외교부에 25명 철수에 대한 협조를 확인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날 밤에도 두어 차례 계속된 대공포 소리에 놀라서 모두들 잠을 설친 채 아침 일찍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프랑스 대사관으로 출발했다.
전쟁터에 유일하게 들어온 <한겨레> 기자
가족을 떠나보내고 대사관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몰려왔다. 난생처음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겪게 되었고 위기상황에서 한국인 철수 업무를 처리했다. 밤낮없이 애를 태웠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해외에서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최후의 보루가 바로 한국대사관이며, 그 일원인 나에게는 피하지 말고 감당해 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괴롭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다른 어떤 직업에서도 맛볼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예멘 내전을 겪으면서 외교부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비로소 실기시험을 통과하고 제대로 된 외교관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멘에 부임했을 때부터 이미 남북의 양 세력 사이에 소규모 무력 충돌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어서 내전 발생의 가능성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내 나름대로 사람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와 현지 신문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하여 부임 후 첫 번째 정세보고를 본부로 보냈다. 본격적인 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었는데, 보고 전문을 보낸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내전이 발생했으니 보기 좋게 망신만 당한 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국내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도 중단될 것이므로 남북 양측 모두 전면전은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났다.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가 비합리적이듯, 전쟁이 일어나는 것 역시 비합리적이었다.
혼자 남은 대사관 직원 5명과 잔류를 선택한 교민 9명은 대사관 지하에서 합숙을 하며 지냈다. 본부와 외교전문의 송수신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전화나 팩스로 가끔씩 내전 상황을 보고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었다.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에는 항공편을 마련하느라 또 고생하지 말고 육로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휘발유와 비상식량을 대사관에 비축해 두었다. 당시는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소식은 <시엔엔>(CNN) 티브이 뉴스나 단파라디오로 듣는 <비비시>(BBC) 뉴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한 가족들과의 유일한 연락수단인 국제전화도 좀처럼 연결이 쉽지 않았다.
내전이 시작되고 3주 정도 지난 5월29일 <한겨레>의 박찬수 기자(현 논설위원)가 한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예멘에 들어왔다.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거쳐 임시 항공편으로 사나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박 기자는 합의 통일 후 4년 만에 내전으로 다시 분열의 위기를 맞은 예멘의 모습을 현지에서 취재해 6월1일부터 4일까지 3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전쟁으로 외국인의 발길이 끊어진 상황에서 처음으로 입국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대사관 직원과 교민들은 반가운 마음에 고국의 소식을 자세히 묻기도 하고, 박 기자가 떠날 때는 모두들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귀국 후에 부쳐달라고 맡기기도 했다. 구구절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쓰면서 전쟁의 경험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다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다행히 7월7일 내전이 종료되어 철수한 지 3개월 만에 가족들이 다시 예멘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975년 4월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하기 직전 사이공의 한 건물 옥상에서 미군 헬기를 타고 탈출하는 사람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총 맞은 채 끝까지 운전한 북 외교관
지금은 전쟁이나 재난이 발생하면 재외국민의 보호를 위해 외교부의 신속대응팀이 즉시 현지에 파견되어 체계적인 대응을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사전 훈련이나 상세한 지침도 없이 현장에서 알아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애환도 많았다. 1991년 1월 남북한의 외교관과 교민들이 내전이 발생한 소말리아를 함께 탈출했던 이야기는 가장 극적인 일화로 남아 있다.
소말리아 반군 세력이 수도 모가디슈로 진격해 들어오자 시내는 군인과 무장괴한이 뒤섞인 채 폭력과 약탈이 난무했고 외국의 대사관과 관저는 좋은 표적이 되었다. 무려 여덟 차례나 무장폭도들의 습격을 받은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더 이상 공관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공항에 나와서 무작정 항공편이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대사관은 현지 경찰에게 따로 돈을 주고 경비를 부탁했기 때문에 직원 가족과 교민 8명이 대사관저에 비교적 안전하게 피난해 있었다. 북한대사관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강신성 한국대사는 김용수 북한대사에게 자신의 관저로 피신할 것을 권했고 김 대사가 이를 받아들여 북한 공관원 14명이 한국대사관저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튿날 강 대사가 이탈리아 대사에게 끈질기게 부탁한 끝에 철수용 특별기에 탑승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 남북한의 동포 22명이 차량 4대에 나누어 타고 한국대사관저에서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우리 차량 행렬을 반군으로 오인한 정부군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게 되자 이를 피하려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우회하면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해 보니 세 번째 차량을 운전했던 북한대사관의 박 서기관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 총탄을 맞고도 필사의 힘을 다해서 마지막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일행은 숨진 박 서기관을 이탈리아 대사관의 마당에 묻어주고 이틀 밤을 함께 지낸 후 이탈리아군 수송기로 소말리아를 탈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조차 미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라서 안타깝다. 하지만 아무리 대립과 반목이 깊다고 해도 외국에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때는 남북한이 다시 한 번 동포애를 발휘하게 되리라고 기대해 본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