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외교관 출신이 대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주요 4개국 등에는 정치인 등 비전문가가 맡는 때도 많다. 2010년 2월8일 서울 도렴동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재외공관장회의에서 각국 주재 대사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첫번째 아내인 이바나가 체코 대사를 맡겠다고 나섰다. 1949년 체코에서 태어나 국가대표 스키 선수에 이어 모델로도 활동했던 이바나는 ‘체코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자신만만한 태도다. 이 소식을 들은 체코의 밀로시 제만 대통령이 ‘미국은 이보다 더 나은 대사를 체코에 보낼 수 없을 것’이라며 공개적인 지지에 나서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트럼프가 이바나를 임명하지 않으면 오히려 제만 대통령의 체면이 깎이는 모양새가 되었다.
미국은 대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를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임명하는 엽관제도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역대 주한 미국대사는 직업외교관 출신이 더 많았지만, 그 밖의 주요국 대사에는 정계나 민간에서 발탁된 인물을 내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체코 대사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아역 스타로 미국 국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던 여배우 셜리 템플이 임명된 적도 있었던 자리다. 트럼프가 전부인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요즘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는 맏딸 이방카의 생모이기도 한 이바나의 소원쯤은 호기롭게 들어주지 않을까?
그런데 외교관이라고 하면 외국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이고 복잡한 외교 관례와 민감한 비밀 교섭에 익숙해야 하는데, 제대로 훈련받은 적도 없는 비전문가가 과연 그 일을 잘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정답은 비전문가라도 훌륭하게 외교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확률은 ‘모 아니면 도’이지만.
지난달 10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가운데)이 서맨사 파워 유엔주재 미국대사(왼쪽)를 접견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오른쪽)도 동행했다. 리퍼트 대사는 전문 외교관이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낸 정치권 인물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주미대사로 발탁된 하와이 개업 의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외교관으로 등용할 만한 인재가 거의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은 외교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외교관을 길러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새로 출범한 외무부는 본부 간부는 물론이고 주요국 대사들을 외교 분야와는 거리가 먼 비전문 인력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사령탑을 맡은 장택상은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을 지내고 외무부 장관이 되었으며, 차관 고창일은 러시아군 복무 경력을 가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주미대사 장면은 교육자와 정치인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주일대표부공사 정한경과 주중특사관(중화민국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 이후 대사관으로 명칭 변경) 특사 정환범은 임시정부의 간부를 지낸 독립운동가였다.
그중에서도 1951년부터 10년간 최장수 주미대사로 활약한 양유찬은 의사 출신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6살 때인 1902년 가족을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양유찬은 보스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1925년부터 하와이에서 개업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51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초대 주미대사를 국무총리로 발탁하고 나서 비어 있던 주미대사 자리를 양유찬에게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통령이 하와이의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직접 가르쳤던 제자인데다 미주지역의 한인단체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임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트럼프 첫 아내 체코대사 희망
미 외교계 전문성 논란 일어
직업외교관은 안정적이지만
정책전환엔 비전문가가 유리
최장수 주미대사 역임 양유찬
한미 FTA 성사 김현종 등은
비전문가 외교관 성공 사례
정권 입맛 맞춘 외교 땐 손해
당시 양유찬은 중국인 의사 2명을 고용하고 있을 정도로 병원이 번창하던 때라 갑자기 병원 일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외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과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와중에 피난 수도인 부산으로 자신을 직접 불러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위해 봉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옛 스승의 손길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2007년 8월24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김현종 국제연합대사(왼쪽) 등 9명의 신임장 수여식을 마친 뒤 환담장으로 가고 있다. 외교부 자문 변호사를 지낸 김현종 전 대사는 노무현 정부 때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아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성사시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1년 4월 워싱턴에 정식으로 부임한 양 대사는 신임인사도 할 겸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서 외교에는 문외한인 자신이 어떻게 하면 대사로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에는 아직 한국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한국을 도와줄 친구를 많이 사귀어 두라고 조언해 주었다. 양 대사는 매우 사교적인 성격인데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서 어떤 모임에서든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영어 발음이 정확하고 동양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영어 연설에도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장점을 무기로 삼아서 양 대사는 친한파 인사를 조직하여 한미재단을 만드는 한편,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초창기 대미외교에 많은 기여를 했다.
“장교 요원 뽑아 사병으로 쓰는 외교부”
1990년 9월 한·소 수교 당시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훗날 조지아의 대통령을 지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외무장관이 될 때까지 외교 분야와는 인연이 없었던 정치인 출신이었다. 1985년 3월 54살의 ‘젊은’ 나이로 정권을 잡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그때까지 무려 28년간이나 외무장관을 맡고 있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경질하고 셰바르드나제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외교 경험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장관직을 고사하는 셰바르드나제에게 고르바초프는 경험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소련의 직업외교관들은 대부분 외교정책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하면서 새 장관을 혹평했다. 촌뜨기 티를 벗지 못한 인물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미코가 버티고 있는 한 외교정책에 변화를 주기 어렵다고 생각한 고르바초프는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기존 외교정책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을 발탁했던 것이다. 완전히 미지의 세계에 내던져진 셰바르드나제는 매일 18시간씩 집무실에 머물면서 체중이 11킬로그램이나 빠질 정도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외무장관으로서 훌륭하게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한국 외교가 초창기를 지나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1970년대부터는 직업외교관 출신이 외교장관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직업외교관이 아니면서 외교장관을 맡은 경우는 한승주(1993년 2월~1994년 12월), 박정수(1998년 3월~1998년 8월), 한승수(2001년 3월~2002년 2월), 윤영관(2003년 2월~2004년 1월) 정도다. 이들은 모두 학자 출신으로, 박정수와 한승수는 정치인으로서의 경력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비전문가 출신으로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인물을 꼽으라면 외교통상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았던 김현종이 아닐까.
원래 국제변호사였던 그가 2004년 7월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을 때의 나이가 45살이었다. 예전에 외교통상부의 자문변호사로 잠시 일했을 때의 상사들이 이제는 국장이나 차관보 자리에서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텃세가 세기로 유명한 외교부 조직을 잘 장악할 수 있을지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통상전략을 무기로 삼았다. 당시만 해도 국제무대에서 자유무역협정 후진국으로 불리던 한국을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의 4대 거대경제권과 동시에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허브 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청사진을 야무지게 밀어붙였다. 정부의 안팎에서 반대와 견제도 극심했지만, 그는 2007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타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할 것으로만 보였던 작품을 보란 듯이 만들어냈으니 그에게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첫번째 아내인 이바나가 트럼프 정부에서 체코 대사를 맡기를 희망한다고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은 체코 태생으로 모델로 활동한 이바나가 2010년 칸영화제의 한 행사에 참가한 모습. EPA
상대방과의 마찰과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 때문에 지금도 외교부 내에서 김 본부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분명한 정책적 비전을 보여주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비롯하여 굵직한 결과들을 만들어냈다는 점만큼은 모두가 인정한다. 그는 2007년 8월 통상교섭본부장 자리를 떠나면서 직원들에게 “외교통상부는 장교 요원을 뽑아서 사병으로 쓴다”고 뼈있는 충고를 남겼다. 직업외교관이 수장이었을 때 외교부의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잡일에 매몰되어 숨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보니 직업외교관이 비전문가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는 셈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든다. 관료조직은 원래 변화와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관리에 적합하다. 직업외교관에게 커다란 정책전환이나 새로운 전략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균형감각을 가지고 안정적인 외교를 하는 데는 그만한 전문가 집단이 없다. 더욱이 정치적 리더십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은 관료집단의 가장 큰 장점이다. 공성(攻城)에는 비전문가가 적합하지만 수성(守城)에는 직업외교관이 탁월한 것이다.
고위외교직에 정치적으로 임명된 인물이 직업외교관에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정치적 임명이 언제나 성공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역량과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인물을 무리하게 임명하면 외교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의 대외적인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초래할 수 있다. 자신을 발탁해준 데 대한 충성심에서 균형을 잃고 편향된 언행을 일삼는 경우도 많다.
앞서 소개한 양유찬 주미대사는 말년에 많은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독재와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일주일 만인 4월26일에 하야를 발표했다. 이 대통령이 하야하자 장기집권 기간 동안 국정 전반에 걸쳐 누적된 폐해에 대해 한꺼번에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1998년 여름 도널드 트럼프와 이바나가 호화 요트 ‘트럼프 프린세스’에서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P
4·19 직후 신문에 등장한 ‘외교민주화’
외교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대통령을 두고 ‘외교에는 귀신’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외교만큼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자부심으로 인해 독선적 외교가 횡행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통령이 혼자 하는 1인 외교 때문에 외무부는 단순한 문서수발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혹평까지 나왔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올랐듯이, 4·19혁명 직후에는 ‘외교민주화’라는 용어가 신문 지면에 등장했을 정도였다.
이승만 외교에 대한 거센 비판 속에서 양유찬 대사는 이 대통령의 사병(私兵)으로 전락한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지탄받게 되었다. 언론은 양 대사가 이승만의 독선적 외교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했으며 대통령의 신임을 내세워 외무부 본부를 무시하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직통 외교를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특히 3·15 부정선거를 자유세계에 모범이 된 공정한 선거였다고 대외적으로 선전하고, 국민의 민주적 봉기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망언을 한 데 대해 비난이 집중되었다. 이 대통령의 하야 직후에 열린 과도 국무원의 첫 회의에서 전국 도지사와 경찰국장의 경질 조처와 함께 양유찬 주미 대사와 유태하 주일대표부 대사의 면직이 결정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에는 양 대사의 거취 문제가 여론의 큰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외교가 국익에 헌신하기보다 정권의 입맛에 봉사하게 되면 결국 어떤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되는지 되새겨보게 만드는 일화다. 그러나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던가. 여론의 지탄을 받으며 물러났던 양유찬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65년에 순회대사로 임명되면서 다시 외교 일선에 복귀한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