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국제정치적 측면뿐 아니라 국제법적인 측면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리걸 마인드에 바탕을 둔 국제법 역량이 상당히 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진은 지난달 12일 청와대에서 코스타리카의 마르셀로 젱킨스 코로나스(앞쪽 왼쪽) 과학기술통신부 장관과 최양희(앞줄 오른쪽)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양국의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학기술혁신 및 창조경제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스스로 하야하겠다고 선언한 대통령에게 제발 하야하지 말아달라고 매달린 일이 있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윤보선 전 대통령의 이야기다.
1961년 5월16일 새벽,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면 총리는 미국대사관으로 피신하려다 여의치 않자 재빨리 혜화동의 가르멜 수녀원으로 도망을 가서 3일 동안 숨어 지냈다. 미국은 처음에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했고 병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진압할 생각까지 있었지만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총리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의원내각제의 최고 권력자인 장 총리가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무책임하게 자취를 감춰버린 탓에 쿠데타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5월18일 장면이 은신하던 수녀원을 나와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함으로써 국가권력은 공식적으로 쿠데타 세력의 손으로 넘어갔다. 5월19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의장, 박정희 소장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출범하자 사태가 일단락되었다고 판단한 윤보선 대통령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하야 방침을 밝힌 지 하루 만인 5월20일 저녁 기자회견에서 그는 갑자기 하야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대통령의 하야 방침 번복은 정권 장악의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고 있다고 생각하던 쿠데타 세력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을까? 실제로는 정반대다. 쿠데타의 지휘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윤보선에게 대통령 자리에 계속 있어달라고 부탁을 했던 결과였다.
혁명이나 쿠데타와 같은 비합법적 수단에 의해 기존 정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부가 생겼을 경우, 다른 국가들이 신정부를 그 국가의 대외적 대표기관으로 인정하는 것을 국제법에서 ‘정부의 승인’이라고 한다. 5·16 쿠데타 직후 장면 내각이 총사퇴한 상황에서 윤보선 대통령까지 하야하게 되면 한국에는 합법적인 정부가 사라진 셈이 되므로, 새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외국으로부터 다시 정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박정희가 윤보선 찾아가 번복 요구
쿠데타 세력은 물론이고 윤 대통령도 미처 이러한 외교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김용식 외무부 사무차관이 쿠데타의 중심인물인 박정희와 김종필에게 이를 설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용식은 5월20일 오후 1시쯤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무실로 박정희를 찾아가 신정부가 아직 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헌법기관인 윤 대통령이 하야하면 외교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릴 우려가 있으니 하야를 말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내각책임제에서 실제 권한도 거의 없는 대통령의 존재가 군사정부에 크게 불편할 것도 없지 않으냐는 말도 덧붙였다.
설명을 듣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정희는 김용식에게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2시쯤 청와대로 간 김용식은 윤 대통령에게 외교적 문제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사퇴를 재고해달라고 설득했다. 윤보선은 하야를 발표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번복하면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스런 대통령으로 보이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김용식도 물러서지 않았다. 만일 이 상태에서 북한이 침공해 오면 유엔이나 우방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고 하자 윤보선은 장도영과 박정희를 불렀다. 청와대로 급히 달려온 박정희가 “김 차관의 얘기 그대로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후세의 역사가들이 옳은 일을 하셨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했고 윤보선은 비로소 마음을 돌렸다.
원래 5월20일 오후에는 하야를 발표한 윤 대통령의 고별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자리가 하야 방침의 번복을 발표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윤보선은 “일단 하야를 결심했으나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그 영향이 막대하다고 하니 만부득이 번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하야를 번복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서 대통령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5·16쿠데타 직후 ‘하야’ 선언
국제법적 ‘정부 승인’ 우려한 군
윤보선에 대통령직 유지 요구
미국이 군사정부 인정뒤 하야
외교는 국제법과 국제정치 두 축
조약국과 지역국 갈등 불가피
현실정치 중시 지역국이 우세
리걸 마인드 외교 역량 키워야
윤보선은 하야 방침을 번복한 지 10개월 뒤인 1962년 3월22일 두 번째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10개월 전과 상황이 바뀐 것은 없었으나, 이때 미국은 윤 대통령의 사임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승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고, 일본도 박정희 정권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국제법상 정부 승인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대통령의 하야 결심을 번복시켰던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법하다.
외교에는 국제법적 측면과 국제정치적 측면이 공존한다. 비합법적으로 성립된 정부에 대한 정부 승인이 국제법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현실 국제정치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따라서 굳이 정부 승인이라는 행위로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오늘날은 정부 승인 폐지론이 나올 정도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1961년 당시에는 북한의 침공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 승인 문제를 걱정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16 쿠데타 직후 윤보선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직 하야를 선언했다가 국제법상 정부 승인의 문제를 우려한 군부의 요청으로 하루 만에 번복했다.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이 1961년 11월27일 귀국 인사차 경무대로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 e영상역사관
글자 수까지 따지는 일본 조약국
게다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이 절대적이었던 당시에는 정부 승인 문제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김용식은 일제 강점기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어서 ‘리걸 마인드’(legal mind)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 경험을 통한 국제정치적 식견과 법률가로서의 소양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의 혼란 속에서도 국제법적 문제점을 짚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교부에서 리걸 마인드를 대표하는 곳으로는 ‘조약국’(현재의 국제법국)이 있다. 반면 국제정치적 시각으로 문제를 보는 대표적인 부서는 동북아시아국, 북미국, 유럽국처럼 개별 국가와의 외교를 담당하는 ‘지역국’이다. 어느 나라든 조약국과 지역국은 묘한 긴장관계 속에서 서로 경쟁한다. 조약국은 국제법적 측면과 논리적 정확성을 중시하지만, 지역국은 국제정치적 현실과 실제적인 외교관계를 강조한다.
외교 업무에서 국제정치적 시각과 국제법적 시각이 충돌할 때 대개는 전자의 우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국제법보다는 국가의 힘이 더 중요한 것이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약국이 지역국을 능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 외교부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외국방문을 앞두고 외교적인 성과사업을 발굴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조약이나 협정의 체결이다.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을 끝내고 양국 국기를 배경으로 상대국 지도자와 나란히 앉아서 조약문에 서명을 마친 뒤 이를 서로 교환하며 악수하는 장면은 홍보효과 만점이다.
대통령의 방문 날짜에 맞추어 조약에 서명하려면 막바지 조약문안 교섭에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조약국은 사소한 문구 하나라도 과거의 관례나 법적 일관성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며 까다로운 입장을 보인다. 담당 지역국은 시간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니 대세에 지장 없는 문제에는 융통성을 보여 달라고 협조를 부탁한다. 그래도 안 되면 대통령의 정상외교에 지장을 초래할 셈이냐고 조약국을 압박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한 대개는 조약국이 울며 겨자 먹기로 양보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외교부에서 조약국의 힘이 막강한 나라로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다르지만 과거 일본 외무성에서는 조약국장(현재의 국제법국장)이 사실상 수석국장의 역할을 했다. 국회 답변에서도 조약국장의 발언은 특별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고 직업외교관의 최고위직인 사무차관 자리에 조약국장 출신이 올라가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한국은 지금까지 조약국장 출신으로 외교장관이 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나는 말단 사무관 시절에 법률적으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집착하는 일본 외무성의 모습을 직접 지켜본 적이 있다. 1990년 재일한국인 3세 이하 후손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의가 거의 마무리되어 한-일 외무장관 간의 합의각서를 만들 때의 이야기다. 회의석상에서 합의각서의 단어나 문구를 둘러싸고 치열한 씨름을 벌이다 잠시 정회하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사이에 일본 쪽 실무자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열심히 상의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서 유심히 보았더니 전체 글자 수를 하나하나 세어가며 원래의 합의 문안과 수정된 문안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국 외교부도 조약이나 합의각서를 만들 때 이 잡듯이 꼼꼼하게 문안을 살펴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글자 수까지 세어 가면서 챙겨보지는 않는다. 1971년 중-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법률적인 세부사항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본의 외교 스타일 때문에 애를 먹은 중국 쪽 관계자들이 일본 외교관들은 법비(法匪)라고 흉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더니 그런 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률가는 최악의 외교관이라지만…
그러나 나무를 보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큰 숲을 보지 못하는 법이듯, 법률적 정확성에 집착하는 일본 외교가 소탐대실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한-일 간의 모든 법적 보상 문제가 완결되었다는 해석에서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일본의 경직된 자세가 좋은 사례다. 전시 여성인권 침해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는 사안의 성질상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유연성을 보인다면 한-일 관계는 물론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도 크게 도움이 될 텐데 일본은 절대로 기존의 법적 입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한편 한국 외교는 큰 숲을 잘 보기는커녕 나무를 보는 데에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 외교가 국제법적인 논리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은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잘 드러난다. 위안부 문제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는지를 두고 한국 정부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모호한 태도를 보인 탓에 국내외적으로 신뢰를 안겨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으로부터 ‘계속 골대를 옮긴다’는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2005년 8월에 뒤늦게나마 청구권협정의 해석을 총정리하여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법적 입장을 정식으로 밝혔지만, 지난해 12월의 위안부 합의가 이러한 정부의 기존 입장과 어떻게 양립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딱 부러진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아마도 국제법적 측면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합의를 서둘렀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외교입문서의 고전으로 유명한 <외교론>의 저자 해럴드 니컬슨은 법률가는 외교관으로서 최악의 부류에 속한다고 했다. 지나치게 세부에 집착하고 형식논리에 매몰되기 쉬운 법률가적 기질이 외교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직 리걸 마인드가 약한 한국 외교는 앞으로도 좀 더 국제법적 역량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진국들의 외교는 모두 탄탄한 리걸 마인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