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4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사드 배치 관련 한-미 실무회담에서 공동실무단의 한국 쪽 대표는 장경수 국방부 정책기획관과 미국 쪽 대표 로버트 헤들룬드 한미연합사령부 기획참모부장(해병 소장)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05년 러일전쟁은 일본을 극동의 변방국에서 세계의 열강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어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러일전쟁을 승리로 끝낸 일본 정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박수와 환호가 아니라 대규모 시민폭동이었다.
1905년 8월 미국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서 러일 양국이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협상을 개최했다. 강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감격으로 흥분상태에 있던 일본 국민들은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9월5일 타결된 강화조약에서 일본 정부는 전쟁 배상금을 포기한데다가 일본군이 점령한 사할린 섬의 북쪽 절반을 러시아에 되돌려주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았고, 2개월 뒤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랴오둥 반도의 조차권과 창춘-뤼순 철도를 넘겨받았고, 만주에서 러시아군을 철수시켜 러시아의 남하 위협을 제거하였으며, 비록 북쪽 절반을 내주기는 했지만 사할린 남부를 새로운 영토로 획득하는 성과도 얻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정부의 언론 검열 때문에 일본군이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 있던 일본 국민들로서는 당연히 받아내야 할 배상금은 물론이고 사할린의 북부까지 허무하게 포기했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국가예산의 6년분에 해당하는 17억엔 이상의 전쟁 비용이 들어갔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은 두 차례나 대규모 증세를 감수했다. 인명 손실도 12만명이 넘었다.
포츠머스 조약에 도쿄는 폭동
야당과 언론과 국민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이러한 국민들의 희생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하나가 되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나 재정형편으로 볼 때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9월5일 도쿄의 한복판에 있는 히비야 공원에서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국민집회가 열렸다. 3만명이 넘는 군중(현재의 도시 인구와 비교하면 20만명에 해당)이 운집했고 내각의 탄핵과 조약의 파기, 전쟁의 계속을 요구하는 강경론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군중집회는 삽시간에 폭동으로 변해서 도쿄 시내 파출소의 70%가 불타고 1천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과거엔 외교는 전문가 영역
변덕스런 여론에 안 휘둘리는
책임 기관에 맡긴다 생각
반대 땐 계엄 등 힘으로 눌러
요즘은 국민 동의가 결정적
주권자가 교섭결과 반대하면
합의 파기와 재협상도 빈번
사드 등 일단 멈춤도 방법
1905년 8~9월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일본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한 두 나라 대표들이 러일전쟁 강화회담을 열고 있다. 회담 내용에 대해 일본에서는 반대 여론이 거셌으며, 그해 9월5일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는 폭동으로 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10년 전에는 일본 정부가 계엄령으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반대하는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4·19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군중시위로 발전하자 6월3일 박정희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학 휴교 조치로 이를 진압했다. 만일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계엄령은 국민들의 더 큰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고 한일 국교정상화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화의 진전에 더하여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같은 기술의 발달로 국민의 여론이 외교에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여론을 중시하는 움직임은 꽤 오래전부터 나타났다. 20세기 초까지는 어느 나라든 국민들에게 전혀 알리지도 않은 채 비밀외교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외교에서도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1919년의 국제연맹 규약에는 모든 조약과 협정의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는 공개외교의 원칙이 명문화되었다. 이를 고전적인 비밀외교와 구별하여 신외교 또는 민주적 외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껏해야 조약의 내용을 공개하는 정도를 가지고 ‘민주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공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요즈음은 국민들이 외교 교섭의 결과에 납득하지 못할 경우 합의의 파기와 재협상을 요구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실제로 여론의 반발 때문에 정부가 일단 외교적으로 합의했던 내용을 나중에 번복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오바마 행정부가 어렵게 체결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하는 12개국이 모여서 체결한 초대형 자유무역협정(FTA)인 티피피가 발효도 되기 전에 무산될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는 티피피에 대한 강력한 비판 여론 때문에 과거 국무장관으로 티피피에 찬성했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조차도 입장을 바꾸어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은 동중국해에서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선이 합의되지 않아 해저 가스전 개발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마찰을 빚고 있다. 2008년 6월 양국 정부는 문제 수역에서 공동으로 가스전을 개발한다는 합의를 이루어냈다. 양측의 명분과 실리가 적절히 조화된 균형 잡힌 내용이었다. 그러나 합의 내용을 구체화하여 조약으로 만드는 실무협상의 단계에서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딪혔다.
펑리위안의 휴대폰 바꾼 중국 네티즌
중국 국내에서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들이 일본에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비판을 쏟아내면서 국내 여론이 악화되자 후진타오 정권은 고민에 빠졌다. 중국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적 합의 자체를 파기하지는 않았지만, 조약체결을 위한 실무협상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공동개발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후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지배라는 독특한 체제 때문에 국민 여론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전략적이고 일관성 있는 외교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과 에스엔에스가 보급되면서 중국 정부도 더 이상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탓에 정통성에 약점을 안고 있는 공산당 정권은 역설적으로 국민 여론의 눈치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은 아이폰을 들고 있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뒤 중국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게 되자 중국제 누비아폰으로 바꾸기도 했다. 중국 제품을 사용하는 펑리위안의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이번에는 ‘궈무서우지’(國母手機, 국모의 휴대폰)라며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오늘날 중국에서 여론의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북한에 있던 일본인 납치 피해자 5명이 모국을 방문했다. 2주일 정도 일본에 머문 뒤에 다시 북한으로 복귀한다는 것이 북일 양쪽의 합의였다. 납치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 후 북한에서 가정을 꾸렸고 자식까지 현지에 남겨두고 왔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입장에서도 일단 북한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납치 피해자가 겨우 풀려났는데 어떻게 다시 납치범의 손에 다시 넘겨줄 수 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약속한 대로 북한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외교협상을 통해 가족들과 함께 완전히 귀국시키는 것이 낫다는 외무성의 목소리는 강경 여론 앞에서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합의를 깨고 피해자들을 국내에 정착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북한의 반발 때문에 모처럼 역사적인 전기를 맞았던 북-일 관계는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가버렸다. 일본 외교에서 어렵게 찾아온 기회가 국내 여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8월15일 경북 성주군민들이 성주에서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성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외교의 연속성보다 중요한 것
일찍이 영국의 해럴드 니컬슨은 <외교론>이라는 명저에서 주권자인 국민들이 국제문제에 무지하며 무책임하기 때문에 민주적 외교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합리적이고 변덕스러운 국민 여론에 휘둘려서는 안 되며, 전문성과 책임의식을 갖춘 정부기관이 외교를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니컬슨의 책은 아직도 외교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77년 전인 1939년에 초판이 나온 만큼 그 후의 시대 변화를 고려하여 비판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도 많다. 이제 더 이상 일반대중은 외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전문가 집단에게 맡겨두는 게 좋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국익을 위해 옳은 판단을 하고 정책을 집행하면 당장은 여론의 비판을 받더라도 나중에 역사가 제대로 평가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자칫 오만이 되어버릴 수 있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광장의 민심은 ‘가르치려 들지 마라, 내가 스스로 판단한다’는 한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이런 시대에 국민을 가르치고 계도한다는 발상이 통할 여지는 없다. 오히려 반발과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국민 여론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신임을 거두어들이자 그동안 국내 여론의 충분한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채 추진되었던 외교적 합의를 파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사드 배치 결정,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외국과 정식으로 합의한 것을 파기하면 신뢰가 훼손되고 상대국과의 관계에도 부작용이 크다고 하면서 파기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외교적 합의를 파기하면 상대국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다. 그러나 여론이 지지하지 않는 합의를 강행하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다. 오늘날은 외교와 국내정치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내의 반대 여론을 잘 설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국으로부터의 외교적 신뢰도 생기는 법이다. 외교적 합의에 따른 의무를 원만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도 국내 여론의 지지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상대국과 외교적인 합의에 앞서 교섭 단계에서부터 여론의 이해를 확보하는 작업을 핵심적 과제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외교의 연속성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미 합의된 대로 밀어붙이겠다는 자세로는 오히려 합의의 파기를 주장하는 여론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일단 현재 상태에서 합의의 이행 작업을 잠시 멈추고 반대 여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겸허한 자세로 좀더 널리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기왕의 합의를 전면 파기하지 않으면서도 국민들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