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고이즈미 당시 총리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이 이뤄지기까지에는 1년간에 걸친 북한과 일본의 비밀 대화채널이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시절의 벤 애플렉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러시아 정보 전문 분석가 ‘잭 라이언’ 역을 맡아 종횡무진의 활약을 보여준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The Sum of all Fears)를 아시는가. 2002년에 개봉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외교와 대화 채널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해 봤다. 화려한 출연진도 기억에 남는다. 중앙정보국장 ‘캐봇’의 배역을 맡은 모건 프리먼은 해외정보 업무에다 워싱턴의 정치 역학까지 꿰뚫고 있는 노련한 실력자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 냈다. 러시아 대통령 ‘네메로프’를 연기한 키어런 하인즈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분위기로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위엄이 어떤 것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전임자의 갑작스런 병사로 대통령에 취임한 네메로프는 대외적으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정보 부족 때문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네메로프에 관한 정보를 분석해온 라이언은 그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합리적인 온건파라고 주장하지만, 정부 내에서는 그가 호전적인 강경파임에 틀림없다는 목소리가 대세를 이룬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적인 극우 파시스트 집단이 암시장에서 조달한 소형 핵폭탄을 볼티모어의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폭발시킨다. 마침 그곳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미국 대통령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외부로 피신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미국은 이를 러시아의 소행이라고 의심하여 보복 공격에 나서고 이에 대해 러시아도 맞대응을 하면서 두 나라는 핵전쟁의 문턱으로 치닫는다.
대통령을 수행하던 중앙정보국장 캐봇은 중상을 입고 응급시설로 이송되는데 그곳으로 찾아온 라이언에게 ‘스피나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숨을 거둔다. 스피나커는 러시아 정보기관 책임자 그루시코프의 암호명이었다. 예전에 캐봇으로부터 미·러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항상 막후 대화 채널을 열어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라이언은 캐봇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휴대용 단말기로 상대방의 정체도 모른 채 스피나커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가 볼티모어 사건의 범인이 아님을 알게 된 라이언은 긴급통신 채널을 통해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양국 대통령 사이에 끼어들어 양측의 오해를 풀고 핵공격을 중지시킨다.
북한 미스터X는 아직도 미스터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처럼 국제사회는 주권국가들이 끝없이 서로를 의심하면서 자기 힘으로 각자도생하는 곳이다. 국제사회는 국내사회처럼 구성원들의 행동을 규율하고 심판해줄 확립된 상위권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력구제 원칙에 따라 자신의 생존을 지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섣부른 신뢰는 금물이고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다. 진정한 선의조차도 기만술책으로 오해받기 쉽다.
게임이론에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는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면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도 상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서로 손해 보는 선택을 하고 마는 국제관계의 안타까운 현실을 잘 설명해준다. 공범으로 체포된 두 명의 용의자가 있는데, 모두 자백을 하면 5년형을 받게 되고 둘 다 범행을 부인하면 6개월 징역의 가벼운 처벌로 끝난다. 만일 둘 중 한 사람만 자백을 하면 그 사람은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석방되지만, 끝까지 범행을 부인한 사람은 무기징역이라는 법정최고형을 받게 된다.
함께 체포된 동료가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버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혼자서 무기징역의 덤터기를 쓰는 일을 피하려고 자백을 선택한다. 그의 동료도 똑같은 심리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두 명 모두 자백을 하고 각각 5년형을 받게 될 확률이 가장 높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지만 결국 자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서로 협력하면 6개월 복역이라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할 따름이다.
실제 외교 현장에서 죄수의 딜레마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북한 핵문제, 독도를 비롯한 영토해양 문제, 한·중·일 협력과 아시아 공동체 추진, 세계적인 핵무기 철폐와 같은 이슈들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는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죄수의 딜레마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두 명의 용의자는 독방에 갇혀 있기 때문에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상대방의 의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면 딜레마에서 간단히 탈출하여 최선의 선택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이 확보된다면 상호 불신에서 오는 불이익을 피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소통 채널이 만들어지면 그다음은 확인과 검증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그 문제에 관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자신의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일수록 스스로 대화 창구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많아지지만, 권한과 능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92년 한-중 수교를 앞두고 한국 쪽에서 정치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비밀 채널 역할을 맡겠다고 무분별하게 나서는 바람에 혼선을 빚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투명성이 높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외교문제에서 누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결정 과정이나 권력의 내부 상황이 베일에 가려진 국가에서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진 인물을 식별해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외적으로 공개된 외교부 조직만 접촉해서는 부족하고, 최고 지도자와 직접 연결되는 핵심 인물을 찾아야 한다. 어렵게 그런 인물과 선이 닿았다고 해도 과연 그가 제대로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전격적인 북한 방문은 양쪽이 1년 동안 비밀리에 비공식 채널을 가동한 결과였다. 일본 쪽은 외무성의 다나카 히토시 아시아대양주국장이 나섰고, 북한 쪽은 ‘미스터 X’라고 알려진 인물이 등장했다. 그의 정체가 2011년 초에 총살된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류경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나왔지만, 아직도 공식 확인은 되지 않았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오른쪽)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2000년 4월8일 중국 차이나월드 호텔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박 장관과 송 부위원장은 당시 베이징 등에서 모두 5차례 접촉했으며, 이어 당시 우리쪽 임동원 국정원장과 북쪽 임동옥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간의 실무접촉도 별도로 진행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간첩혐의 기자 석방’ 관철 뒤 신뢰
다나카와 미스터X는 2주일에 한번꼴로 중국 다롄 등지에서 20여차례나 만나 비밀 교섭을 진행했다. 일본 쪽은 미스터X의 권한과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에서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2년 가까이 복역 중이던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전직기자 스기시마 다카시를 풀어달라는 숙제를 던졌다. 그 후 2002년 2월에 스기시마가 석방되었고, 이를 본 일본 쪽은 미스터X를 믿고 본격적인 협상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일본 쪽도 자신의 권한과 능력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신문에는 ‘총리의 동정’이라는 작은 코너가 있으니 그것을 주의깊게 살펴보라고 북한 쪽에 일러주었다. 여기에는 그 전날 총리의 하루 일정표가 오·만찬의 참석자 이름은 물론이고, 총리실 비서관이나 정부 부처 간부들의 일상적인 보고까지 포함하여 분 단위로 모두 공개된다. 다나카 국장은 고이즈미 방북을 준비하는 1년 동안 모두 88회나 총리에게 직접 대면보고를 했고, 이러한 사실은 신문의 지면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미스터X도 그 내용을 보고 교섭 상대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상호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북한과 일본의 협상 담당자들은 고이즈미 방북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대화 채널이 잘 작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진의를 가늠하기 힘든 상대방의 언행으로부터 정확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소통 채널을 만드는 것보다 몇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러시아가 체첸 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를 화학무기로 폭격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강경파인 네메로프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단호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한다. 라이언은 네메로프가 아니라 군부 내 불만분자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지만 동조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때 네메로프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자위권의 차원에서 자신이 직접 체첸 폭격 명령을 내렸다고 말하는 장면이 티브이(TV)에 보도되었다. 이제 그가 강경론자라는 사실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어진 셈이다.
영화는 네메로프가 대국민 연설을 마치고 퇴장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장면으로 바뀐다. 네메로프는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비서관과 경호원들을 모두 물리치고 정보기관 책임자 그루시코프만 들어오도록 한다.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네메로프는 짜증난 얼굴로 대체 누구의 짓이냐고 언성을 높인다. 그루시코프가 군부의 골수 공산주의자 지휘관들의 소행이라고 보고하고 모두 총살시키겠다고 하자, 네메로프는 공개적으로 처형하면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꼴이 되니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그러고는 “나약하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누명을 쓰는 게 낫다”고 혼잣말처럼 덧붙인다.
아직 국내적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네메로프는 정적들의 도전을 막아내기 위해서 국내적으로나 외교적으로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체첸 공격이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사실대로 설명하면 스스로 무력함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명령했다고 한 것이고, 한술 더 떠서 체첸은 러시아의 국내문제이니 미국은 간섭하지 말라고 의도적으로 강경한 발언까지 했던 것이다.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를 선물로
실제 외교 현장에서는 자국의 내부 사정이나 자신의 속마음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그렇게 말하는 진짜 의도가 뭐냐고 속 시원하게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직설적으로 대화하기 힘든 경우가 많은 법인데 하물며 국가들 사이에서는 어떻겠는가. 국가나 지도자 개인의 체면과 위신 때문에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거나 심지어 반대 방향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럴 때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방의 언행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의도를 구별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대화 채널을 가동하여 상대방이 처한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려고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외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거나 상대방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에서 상호 불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불행한 충돌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썸 오브 올 피어스>의 디브이디(DVD)를 여러 장 사 두었다가 업무상 만나게 되는 상대국 외교관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오락 영화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상대방이 영화를 보며 느낀 바가 있어서 내게 좋은 대화 채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 중국, 예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