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2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국해방전쟁 발발일’ 기념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북한은 이날부터 ‘조국해방전쟁 승전일’로 기념하는 7월27일까지를 ‘반미투쟁 월간’으로 정해 미 제국주의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연합뉴스
1952년 7월11일 평양 하늘에 1250여대의 미군 폭격기가 떴다. 한국전쟁 발발 이래 최대 규모의 공습이었다. 평양은 전쟁 초기부터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폭격을 받았지만, 이날의 폭격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폭격은 11일 아침부터 12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낮에만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밤에는 2000여명의 사망자와 4900여명의 부상자 혹은 행방불명자가 나왔다. (<폭격-미 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에서)
당시 <노동신문>은 분노에 찬 어조로 주택지구의 피해상황을 전했다. 거기에 부모형제 6명을 모두 잃었다는 한 여성의 절규가 실려 있다. “자그마한 토굴들만 밀집해 있는 이곳을 놈들은 군사적 목표라고 한다. 죽은 부모와 오빠, 동생의 원쑤인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어찌 죽음을 주지 않고, 참을 수 있겠는가! 죽음은 죽음으로,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 오늘날 북한의 반미 구호에 담긴 증오와 적개심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
이날의 폭격은 ‘항공압력 전략’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의 산물이었다. 미국은 정전협상이 포로 송환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공중폭격을 압력수단으로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철도 차단이라는 전술적 목표에 집중했던 공중폭격에 협상력 제고라는 전략적 목표를 부과한 것이다. 1952년 여름부터 적용된 이 전략에 따라 보급품 기지, 후방의 민간인, 나아가 촌락과 도시 전체가 폭격 리스트의 앞단으로 올라왔다. 벼농사 지역을 수몰시키기 위해 저수지 둑을 폭격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런 ‘협상하며 폭격하기’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1년 넘게 지속됐다.
공중폭격은 ‘증오의 기억’을 새긴다. 1939년 중국을 침공한 일본군의 충칭 폭격을 목도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는 공중폭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상처를 이렇게 썼다. “공습은 급강하 폭격기를 피하기 위해 지하실에 처박히고 들판에 얼굴을 파묻어본 적이 없거나, 자식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머리를 찾는 어머니를 본 적이 없거나, 혹은 불에 타버린 학생들의 고약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일으킨다.”
북한의 반미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증오’에 바탕한 이데올로기이다. 냉전의 담론만으론 그것의 급속한 확산과 격렬한 계승을 설명할 수 없다. 북한에선 해마다 6월25일부터 7월27일까지 대규모 반미집회가 열린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과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 사이에 있었던 모든 ‘증오의 기억’을 일깨우는 집단의식이다. 그런데 올해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집회나 행사가 열리지 않고 있다. <노동신문>은 미 제국주의 운운하는 사설도 싣지 않고 있다. 북한은 이제 더는 미국을 증오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라고 말했다. 북-미 관계의 발목을 잡는 게 ‘핵과 미사일’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이라는 진술은 이채롭다. 전쟁과 대립의 시대를 정말 과거로 돌리고 싶다는 고백 같다. 김 위원장이 공동성명에서 미군 유해의 즉각적인 송환을 약속한 데서도 그런 바람이 보인다.
평양은 한때 한반도에서 가장 ‘친미적인 도시’였다. 개항과 일제 시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력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당시 장로교 교인의 79%가 평안도와 황해도에 몰렸다. 근·현대 평안도 사회지도층의 성격을 분석한 논문들을 보면, 이 지역에서 기독교는 종교를 넘어 미국과 동의어였다는 분석이 꽤 나온다. 한국전쟁이 그런 평양을 세계에서 가장 ‘반미적인 도시’로 바꿔놓았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미군 유해를 돌려주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겨냥한 군사연습을 유예하기로 했다. 모두가 증오를 선의로 돌리려는 변화들이다. 그런 가운데 비핵화를 논의하기 위한 북-미 고위급 협상이 다가오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 언젠가 증오의 기억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완전한 비핵화’보다 더 역사적인 반전이 될 것이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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