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5일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사절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중국 단둥.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을 마주보고 앉은 도시의 하늘은 우중충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더니 바람마저 들썩였다. 판문점선언 이행 방안을 토론하기 위해 ‘범민족 평화포럼’에 참석한 남북 및 해외동포들의 심사도 날씨처럼 뒤숭숭했다. 중국 당국이 느닷없이 신고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포럼을 불허한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포럼은 결국 다음날 선양으로 장소를 옮겨 치러졌다.
하루 전날 서울. 신의주를 향해 출발하려던 열차의 발이 묶였다. 판문점선언 합의사항인 경의선 철도 연결을 위해 남북이 기획한 북쪽 구간 점검 운행을 유엔사령부가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면 48시간 전에 통보해야 하는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엔사는 열차에 실린 물자들의 정보까지 요구했다. 북쪽에서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던 이들은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선언 이행이 곳곳에서 난관에 처했다. 남북 교류, 군사적 신뢰 구축,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판문점선언의 세 바퀴가 사실상 연계돼 있어 하나라도 삐걱거리면 전체가 굴러가기 힘든 상황이다. 여기에 대북제재까지 강화돼 남북 경제협력은 말조차 꺼내기 어렵다. 올해 안에 하기로 한 종전선언은 여전히 성사 여부가 불확실하다. 남북과 미국의 외교 일정을 감안하면 이달 하순 유엔총회를 넘길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중국과 패권 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무역분쟁으로 시작한 두 나라의 갈등은 슬그머니 미래의 위상을 다투는 전략적 대결로 옮아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중국과의 관계에서 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으나, 최근엔 이를 지정학적 대결과 결부시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하면서 "폼페이오 장관은 중국과의 무역 문제가 해결된 뒤 북한으로 갈 것”이라고 밝힌 것은 이런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중국 역시 미국과 전략적 경쟁을 피할 생각이 없다. 중국 당국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주요 싱크탱크들이 잇따라 미국의 의도를 중국의 패권을 견제하려는 전략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무역분쟁 초기 미국의 공세를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책략으로 평가했던 것과 사뭇 다르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최근 “미국의 무역전쟁은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핵심 전략"이라며 미국에 대한 전략적 인내와 장기적 대응을 주문했다. 중국의 장기적 대응에 지정학적 고려가 들어갈 것은 분명하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지정학적 접근을 강화할수록 남북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판문점선언 이행이 남북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그런 ‘위험한 미래’를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북한 뒤에 중국이 있다고 믿는 상황에선 더욱 그럴 것이다. 중국 역시 자신을 배제한 한반도 정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미국과의 장기전을 감안하면 북한이란 카드를 결코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한국이 미국과 ‘긴밀한 협의’를 강조하고, 북한이 중국과 ‘새로운 밀착’을 과시하는 게 미국과 중국의 전략자산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 당국이 단둥 포럼에 제동을 걸자, 베이징과 선양에선 각본에 없던 남북 공조가 펼쳐졌다. 판문점선언 이후 남북과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행 방안을 토론하는 자리는 처음이기에, 남북 모두 급박하게 움직였다. 베이징에선 북한 대사가 직접 중국 외교부를 찾아가 포럼의 성격과 의미를 설득했다. 선양에선 우리 총영사가 북한 총영사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대책을 협의했다. 남북 총영사가 통화한 것 역시 처음이었다. 포럼에 참석한 이들은 이날 펼쳐진 남북 공조를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라며 화제에 올렸다. 서울과 평양에서도 그런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을까.
유강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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