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6일 프레스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유엔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전세계에 가서 증언도 하고, 미국에 가서 결의안(2007년 6월 미 하원 결의안)도 통과시키고, 샌프란시스코에 기림비도 세웠습니다. 재판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아직도 무법 행세를 합니다. 한국 법원 판결을 무시하며, 항소조차 안 하고 뻗대고 있습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우리 법원이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16일 오전 11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장이 마련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은 한·일 양국에서 몰려든 100명 넘는 기자들로 빽빽했다. 분홍색 한복을 차려 입은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는 취재진에게 인사를 건넨 뒤 미리 준비된 호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감정이 격해진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고, 마지막 대목에선 결국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시간이 없다”며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들한테 가서 말할 수 있도록 문재인 대통령님과 우리 나라 정부가 국제법적으로 판결을 받아 달라는 게 저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8일 위안부 문제와 같은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선 국제관습법상 ‘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며 일본 정부에 배상을 명한 한국 법원의 ‘획기적 판결’이 나온 뒤, 한-일 두 나라 일각에서 제기돼 온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론’이 생존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입을 통해 공식화된 것이다.
16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유엔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촉구 기자회견’장의 모습
이날 회견 참석자들은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한국에 유리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김현정 대변인은 “피해자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해달라고 절규했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가) 이를 이룰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친위에 참여 중인 신희석 박사(국제법)도 “한국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 이 판결을 통해 한-일 간의 오랜 역사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를 만들 수 있고, 지난 10년 간 출구전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탄난 두 나라 관계 회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나아가 국제사법재판소가 “실체적으로는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범죄”로 인정하면서, “절차적으로 개인 배상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포기됐고, 한국 법원은 일본의 주권면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으로 예측했다. 이를 통해 피해자들이 주장해 온 개인 배상청구권은 상실되지만, 핵심 요구였던 ‘위안부 제도가 일본의 국가범죄였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으니 “만족스런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용수 할머니와 ‘추진위’의 주장처럼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려면 한일 양국의 동의가 전제돼야 하는데, 두 나라 셈법이 복잡하다. 일단 한국은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한국이 섣불리 제소 얘기를 꺼냈다가 일본의 ‘노회한 외교술’에 걸려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위안부 할머니 등의 입장을 조금 더 청취해보고자 하며, 국제사법제판소 제소 문제는 신중하게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도 정례 기자회견에서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발언한 것인지 알지 못해 언급을 삼가려 한다”는 반응에 그쳤다. 하지만, 일본은 2015년 12·28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는 입장이어서 ‘위안부 문제만’을 회부하자는 추진위의 제안엔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도 “위안부 문제로만 간다면 승소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일본이 독도, 식민통치의 합법성 등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까지 건드릴 수 있다. 결국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또 다른 갈등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길윤형 김지은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