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5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5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에서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지난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 판결 뒤 더욱 악화한 양국 관계가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성사된 고위급 회담이어서 주목된다.
한-일 외교장관 회담은 이날 아침 런던 그로스베너 호텔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를 마친 뒤 열렸다. 한·일 양국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3개국 회담이 50분 정도 진행됐고, 이후 자리를 옮겨 양자 회담이 20분 이어졌다. 지난 2월 초 취임한 정 장관은 한-일 관계가 악화된 탓에 모테기 외무상과 석달 동안 전화 통화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두 나라 외교장관이 얼굴을 마주한 것은 지난해 2월15일 뮌헨 안보회의 참석을 계기로 만난 지 1년3개월 만이다.
회담 직후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내어 두 장관이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할 필요성에 공감”했고,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핵심 현안인 북한·북핵 문제 관련해선 “한·일 양국 및 한·미·일 3국이 긴밀히 소통해온 점을 평가”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에 실질적 진전을 가져오기 위해 지속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양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일본군 위안부 판결 △후쿠시마 오염수 등 주요 현안을 놓고는 여전히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정 장관은 이날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결정과 관련해 “주변국과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이루어진 데 대해 깊은 우려와 함께 반대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고, 일본은 자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반면 모테기 외무상은 위안부 배상 판결과 대법원의 강제동원 노동자 배상 판결 문제에 대한 일본 쪽 기본 입장을 반복했다. 일본 정부는 두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 정부간 합의로 해결되어 두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면서 한국 정부에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외교부는 이에 정 장관이 “일 측의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는 과거사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위안부 및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우리 입장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만남 시간이 짧아 속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양쪽 모두 기본 입장을 되풀이한 셈이다.
이날 두 장관의 만남이 향후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주요 현안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차가 쉽게 좁혀지기 어려운데다 일본 국내 정치 상황을 핑계 삼아 막판까지 회동 성사 여부를 놓고 일본 정부가 줄다리기를 한 정황을 보면 한-일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대중·대북 정책 추진을 위해 한·미·일의 긴밀한 협력을 중시하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응답하는 모양새로 한·일이 마주 앉은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두 장관 모두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은 꽉 막힌 양국 관계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회동이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진행됐으며 양국 간 의사소통을 본격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해 눈길을 끈다. 일본 정부는 그간 “한국이 먼저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고위급 소통을 거부하는 등 경직된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에 지난 1월 부임한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뿐 아니라 모테기 외무상과 여태 만나지도 못하고, 일본 국왕에게 신임장 제정도 하지 못한 상태다. 이번 회동을 시작으로 양국 고위급 간 소통이 재개될지 여부가 향후 한-일 관계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앞서 미국 쪽 주선으로 성사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에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의 실질적 진전을 위해 공조를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3일(현지시각)에 이어 두 장관에게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를 설명하고, 세 장관은 향후 대북정책 추진 과정에서도 3국 간 계속 긴밀히 소통·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외교부는 이 자리에서 세 장관이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언론이 전하는 일본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아사히신문>은 모테기 외상이 위안부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의 적절한 조처를 요구했으며,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과 관련해선 현금화는 “절대 피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한국이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일본의 기본 입장을 되풀이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당국자도 이번 회담이 성사된 것도 미국의 의향에 따른 것이라며 “모테기 외상이 미국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지은 길윤형 기자
mir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