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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BAR

‘하야 그 너머’까지 열망하는 촛불의 노래에 응답하라

등록 2016-11-16 08:04수정 2017-01-18 16:13

정치BAR_1960·1987…2016년의 거리의 정치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선이 악을 물리치고, 염치가 파렴치를 이길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언제나 조롱받아 왔다.”

10여년의 침묵을 깨고 광장의 ‘100만 촛불’ 앞에 마이크를 잡고 선 사내의 표정은 무섭도록 차분했다. 하지만 악이 승하고 파렴치가 득세해온 현실에 대한 비탄은, 지그시 억누른 회한과 뒤섞여 주름 패인 사내의 검은 얼굴에 속절없는 우울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굵게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익숙한 선율을 타고 광장의 밤공기를 가르고 퍼져나갈 때, 그를 아는 나와 우리 세대의 가슴은 먹먹함과 회한으로 울렁이기 시작했다.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정태춘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1년 여름, 12명이 목숨을 끊었다

1990년대 중반, 정태춘의 이 노래를 학생회관 동아리방과 신촌 술집 ‘섬’에서 줄기차게 듣고 따라불렀다. 나이차가 족히 스무살에 가까웠을 그와 우리는 ‘감정의 연좌제’로 묶여있었다. 그 연좌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공통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사건을 ‘91년 5월투쟁’이라 불렀다. 정태춘에게도 우리 세대에게도 1991년 5월은 쓰린 패배와 좌절의 시간이었다. 50여일에 걸쳐 무려 1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자기 몸을 불사르는 분신자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패퇴했고 그 외상은 깊고 오래갔다. 1년 뒤 정태춘은 종로 거리에서 흩어진 그해 5월의 ‘깃발 군중’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그로부터 24년이 흐른 2016년 11월12일 밤, 촛불의 바다 한가운데서 환갑을 넘긴 은빛 머리칼의 정태춘과 우리는 다시 조우했다. 그러나 벅찬 감동의 여운 속에서도 정태춘이 ‘투사’ 시절의 대표곡인 ‘아, 대한민국’도, 약동하는 봄의 희망을 노래한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도 아닌, 비감한 후일담 풍의 이 노래를 그 자리에서 불렀다는 사실에 내 생각은 복잡해졌다. 이 거대한 100만 촛불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그도 나처럼 이 열광의 끝이 불안했던 것일까.

광장을 뒤로 하고 집에 오는 길, 청와대가 지척인 내자동 네거리에서 경찰과 드잡이하는 일군의 시위대를 목격했다. “싸우지마.” “당신들, 이 축제같은 시위를 망칠 셈이야?” 평화주의자들의 거센 비난이 ‘전투적 시위꾼들’의 뒤통수에 날아 꽂혔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는 그들의 과격 행동을 촉발한 배후 감정 역시 ‘불안에서 비롯된 절박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100만이 모여도 경찰 저지선 하나 뚫지 못하고, 하야를 주야장천 요구하면서도 결국엔 대통령 입만 바라봐야 하는 무기력한 현실에, 짧은 열광의 순간 뒤엔 어김없이 지루하고 건조한 일상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 역시 절망했던 것은 아닐까.

1991년 5월 서울 제기동 고려대 앞의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1991년 5월 서울 제기동 고려대 앞의 모습.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거리에 나가도 ‘힘없는 정치’는 패배한 기억

돌이켜보면 내게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거리 정치’는 5년 안팎 주기로 도래하는 집단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초기의 설렘과 열광 뒤에는 초조와 불안, 낙담과 환멸의 시간이 어김없이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는 그 기점을 2004년의 ‘노무현 탄핵’으로 잡았지만, 내 기억엔 고등학생 신분으로 맞닥뜨린 1987년 6월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 형들을 따라 투쟁가를 익히고, 팸플릿을 독학하고, 세상이 뒤집힐 것이란 설익은 희망과 함께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을 때, 내게 남은 것은 ‘힘없는 정의는 패배한다’는 조숙한 비관주의였다.

1990년 ‘3당 합당’과 함께 시작된 대학생활은 불운하게도 ‘전투적 학생운동’의 가파른 쇠락기와 겹쳤다. 1991년 4월26일 강경대의 죽음 이후 50일 남짓 지속된 대규모 거리투쟁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혁명의 가능성’에 내기 걸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성당으로 도피한 지도부의 고립으로 거칠었던 싸움판의 호흡이 잦아들고, 6월 광역의원 선거 참패로 ‘열사들’이 확인사살당하고, 7월의 폭염과 함께 소비에트 제국의 부고장이 날아들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운명과 싸우는 짓은 순간의 환희와 평생의 상처라는”(김중식 ‘중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돌연한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따라부르며 ‘한 시대의 저묾’을 애도했지만, 거리 정치는 이후로도 어김없이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이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1996년 군대 내무반 텔레비전 화면에서 지켜본 노동법 개정 투쟁이 그랬고, 사회부 사건기자로 경험한 2002년 미선·효순이 촛불과 2004년 탄핵 반대 촛불,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촛불 역시 그랬다. 지금 목도중인 ‘박근혜 하야 촛불’은 또 어떤가.

지금 상황을 1960년 4·19 직전이나 1987년 6월항쟁 전야에 견주는 이들을 자주 본다. 하지만 조직된 항의의 양상은 ‘물리력 대 물리력’이 격돌했던 1960년이나 1987년보다는 2004년 이후 주기적으로 명멸한 ‘촛불 정국’에 가까워 보인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가능성이 열려있고, 보수-자유주의 정당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에서 의회(국회)라는 대의 시스템을 우회하려는 거리의 정치는 왜 주기적 출몰을 반복하는가.

광장의 열기는 늘 ‘반쪽개혁’으로 소진

최장집의 뒤를 잇는 정당정치론자 박상훈의 설명은 이렇다. 1987년 민주화는 ‘미완의 민주화’였으며, 거리정치는 불완전한 87년 민주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거리정치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원인을 그는 “민주화가 사회운동에 의해 이뤄졌지만, 그 운동의 에너지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다”는 데서 찾는다. 진보적 운동세력이 배제된 보수독점적 정당체제가 고착되면서 의회와 사회적 요구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체제가 흡수하지 못한 열정과 에너지가 정치적·도덕적 발화점을 만나면 어김없이 의회라는 대의 시스템을 월경해 거리로 용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충분히 수긍가는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촛불정국 초기 ‘거국내각 구성’이란 지극히 정치적인 프로세스가 여야를 막론한 공통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청년시절 내 인식체계의 한 귀퉁이를 지탱했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 개념을 떠올렸다. 수동혁명은 ‘지배세력이 대중으로부터 통치에 대한 지지와 동의를 확보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자기혁신을 추구하는 정치기획’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이런 자기혁신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저항의 에너지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예방적 차원의 체제혁신에 나서는 게 지배세력의 생리인 까닭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 위기가 지배체제의 붕괴로 이어지는 상황(능동혁명)을 막기 위한 사실상의 ‘예방 혁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1987년 6월항쟁 막바지에 나온 노태우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과 그 이후의 민주화 이행 조처야말로 수동혁명의 전형이었다.

한국정치에 대한 이런 진단을 나는 정치학자 박명림의 20여년 전 논문에서 처음 접했다. 대학원생 시절 읽었던 그의 논문은 한국 현대사 전반을 수동혁명의 틀로 설명한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한 농지개혁과 자유민주주의 헌법 제정, 박정희 정권의 자본주의 산업화, 1987년 이후의 민주화 모두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급진적 사회변화의 열정과 에너지를 흡수해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수동혁명의 성격을 띄고 있었고, 그 직전엔 예외 없이 ‘짧고 격렬한 저항적 에너지의 폭발’(해방공간의 대중운동, 4·19와 혁신운동,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당시 박명림이 열거했던 ‘짧고 격렬한 폭발기’의 특징은 요즘 우리가 목격하는 촛불 정국에도 대체로 들어맞는다.

“수많은 단체의 출현, 흥분과 설렘, 집단 철야, 폭포수 같은 연설과 구름 같은 집회 인파, 수많은 노선의 등장과 쟁투, 공연한 분주함과 바깥 소식에 목말라하는 외출.”

‘열광 뒤 환멸’ 악순환의 고리 끊을 수 있을까

이처럼 ‘예외적 열정’으로 가득찬 시간을 박명림은 정치학자 아리스티드 졸버그의 표현을 빌려 ‘광기의 순간’(열정의 순간)이라 이름붙였다. 문제는 이 짧은 ‘광기의 순간’의 끝은 항상 수동혁명이었다는 데 있다. 강력한 관료제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로 지탱되는 지배구조의 견고함, 그리고 저항세력의 반복되는 내부 분열은 지금까지의 모든 ‘광기의 순간’을 항상 ‘능동혁명’의 문지방 앞에서 좌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점은 한국 현대사에 관심 가진 이라면 누구나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다. 4·19 직후엔 야당과 학생·혁신 세력의 분열이, 1987년엔 사회운동세력과 야당, 나아가 야당 내 양김 분파의 분열이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열정과 에너지를 권위주의 구세력이 주도한 ‘혁명 없는 혁명’에 고스란히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은 분열했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은 분열했다.

내가 아는 한 이같은 ‘열광과 환멸의 이중주’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시인 김수영이었다. 자신을 그토록 흥분시켰던 4·19가 이승만 하야 뒤 등장한 허정 과도내각에 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김수영은 썼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보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혁명과 육법전서’).

‘100만 촛불민심’의 귀결점이 어디일지, 과문한 나로선 예단하기 어렵다. 통치의 권위와 정당성을 상실한 대통령 앞엔 ‘하야냐 탄핵이냐’라는 두가지 선택지만 남았고, 내가 출입하는 제1야당 지도부는 헌정질서 중단 위기를 막으려면 대통령의 ‘질서있는 퇴진’만이 누란의 위기를 타개할 현실적 해법이라 거듭해 강조한다.

‘거국내각 구성’이 완료된 뒤 ‘단계적 하야’와 ‘조기대선’으로 이어지는 수습카드는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프로세스지만, 김수영식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육법전서 혁명’(수동혁명)의 길이다. 그렇다고 ‘즉각 하야’가 모든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 될 것 같지도 않다. ‘하야’를 요구하는 거리의 목소리엔 ‘헬조선’이란 자조섞인 탄식 안에 응축된 불평등과 반칙,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견고한 기득권 체제의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하야 그 너머’에 대한 열망 역시 담겨 있는 까닭이다.

‘열광과 환멸’이 교대하는 현대사의 카르마를 이번에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연대의 일체감이 충일했던 12일 밤 광화문과 정태춘의 고뇌를 떠올리며, 설령 이 숙명의 윤회 사슬에 다시 한번 결박된다 해도 쉽게 낙담하진 않으리라 애써 나는 다짐해본다.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었지만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와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알았기에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그 방을 생각하며’)던 1960년 10월30일의 김수영처럼.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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