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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이 나고 자란 곳, 들썩이는 그 고향

등록 2016-12-28 01:41수정 2016-12-28 09:52

정치BAR_반기문의 고향, 충주·음성을 가다
‘1등이 되어라. 2등은 패배다.’

반기문(72) 유엔 사무총장이 유년 시절을 보낸 충주 본가 ‘반선재’(반기문의 착한 집)에 걸린 액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명언 19가지’ 중 하나다. 그동안 대선 출마에 모호한 입장을 취했던 반 총장의 태도와 달리, 고향집은 이미 옛 집주인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25일 오후 충북 충주시 문화동 반선재를 찾았다. 인근 무학시장 곳곳에 붙은 ‘반기문의 향수가 남아 있는…’이란 펼침막이 없었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구불구불한 시장 골목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온 남성 셋이 반 총장 조형물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다.

그가 살던 집에 수맥 짚는 봉을 대면 “아직도 엄청난 기가 살아 있어요“

“이거 내가 찾은 거요. 반 총장 본가란 걸 알고 경매로 넘어가려는 찰나에 가까스로 잡아 복원했어요.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요? 큰일 하실 분인데.” ‘반선재 해설가’ 조준형(76)씨가 다가왔다. 풍수지리학을 강의했다는 조씨는 느닷없이 ‘와이(Y)로드’라는 기(氣) 측정 기구를 가져왔다. 반 총장이 묵었다는 방 쪽으로 다가가자 기구 끝이 아래로 기울었다. “보세요. 아직도 엄청난 기가 살아 있어요. 반 총장은 이 기로 틀림없이 대통령이 될 겁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자란 충북 충주시 반선재에 조성된 부엌 모습. 반 총장의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자란 충북 충주시 반선재에 조성된 부엌 모습. 반 총장의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부엌 딸린 방 넷짜리 이 벽돌집(75㎡)은 반 총장이 1950년부터 1971년 결혼 전까지 살던 곳이다. 반선재는 그 이름처럼 아담하다. 크고 작은 가마솥 3개, 풍로 위 냄비, 가지런하게 연탄이 쌓인 부엌에선 ‘마네킹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고 있고, 방 안에선 한 청년이 공부 중이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꾼다. 그러나 지금 공부를 하면 꿈을 실현시킨다’는 신념이 오늘의 반기문을 만들었다고 조씨가 설명했다. ‘반 총장은 지금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충주에서 반 총장은 ‘영어 신동’으로 통했다. 영어를 잘했던 그는 1962년 충주고 재학 시절 적십자사 한국 대표로 뽑혀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충북도교육청은 이 일화에 ‘영감’을 얻어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된 2007년부터 ‘반기문 영어경시대회’를 열어 우수 학생에게 유엔 탐방 기회를 주고 있다.

방명록엔 “반기문 대통령 짱” vs “유엔 총장으로만 빛나주시길”

반선재를 찾은 이들은 방명록에 다양한 글을 남겼다. ‘반기문 대통령 짱’(문○○, 충북 청주), ‘끝까지 좋은 빛이 되어주세요’(이○○, 경기 광명) 등의 우호적 문장 사이에 ‘유엔 사무총장으로만 빛나주시길’(김○○, 경기)이란 뼈있는 글도 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가 대부분이었지만 ‘간신배’란 격한 표현도 있다.

충주시는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된 2007년 이후 국비·민자 등 2700여억원을 들여 충주시 남한강로(금릉동) 63만4천㎡에 유엔평화공원 조성을 추진했다. ‘반기문 꿈 자람 길’이란 길도 조성하고 꿈 자람 국외연수·봉사, 반기문 비전스쿨 등 사업도 진행해왔다. 그러다가 유엔평화공원은 2011년 이후 세계무술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지난 4월엔 라바랜드라는 놀이공원도 들어섰다. 김기홍 충주시 기획팀장은 “지역 대표 인물이긴 하지만 생존한 이의 치적을 미화한다는 지적에 따라 사업 내용을 조정하고,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했다.

그가 자란 충주에선 ‘국제기구대표 예우법’ 발의 태세

그러나 충주 사람들은 이미 들썩이고 있다. 최근 반 총장이 대선 출마 시사 발언을 한 뒤부터 더욱 분주해졌다. 27일 오후엔 반 총장 팬클럽 ‘반딧불이’ 충주지회가 창립식을 열었다. 윤주성 반딧불이 충주지회 회장은 “일단 150~200명 정도 모여서 미래를 이야기하려 한다. 반 총장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북핵 문제 등으로 국외 역학관계가 특히 중요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라고 했다. ‘반딧불이’ 전국 자문위원을 맡은 이언구(61) 충북도의원도 “반 총장이 뜻을 보인 만큼 이제 적극적으로 중부권 대망론을 알려나갈 생각이다. 반 총장이 귀국하면 충북 출신 새누리당 의원 등 충청 정치권이 하나로 모일 것”이라고 했다. 반 총장을 국가원수급으로 예우하자는 내용을 담아 ‘전직 국제기구대표 예우에 관한 법률’ 발의를 준비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이종배 새누리당 의원(충주)도 ‘반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 의원은 “반 총장이 오면 당연히 함께한다. 국제기구대표 예우법은 반 총장 한명만을 위한 법은 아니지만 민감한 시기여서 아직 발의는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음성에선 생가 복원에 반기문평화랜드, 유엔반기문기념광장…

충주시와 함께 ‘반기문 마케팅’ 경쟁을 벌여왔던 충북 음성도 만만치 않다. 충주가 ‘꿈을 키운 유년 시절’을 강조하고 있다면, 음성은 ‘피를 나눈 출생지’를 앞세운다. 음성 주요 길목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고향 음성입니다’라는 대형 간판이 설치돼 있다. 36번 국도 음성 초입엔 그의 사진까지 곁들인 간판과 광고판도 있다. 가로수 보호 천막에도 ‘반기문’이 박혀 있으며, 생가 마을과 반기문기념광장 주변 등 두 곳에 ‘반기문길’이 조성돼 있다. 한때 음성 지명을 아예 ‘반기문군’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도 돌았다.

음성은 2007년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이후 그가 태어난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에 생가를 복원하고, 바로 옆엔 반기문평화랜드, 2㎞ 남짓 떨어진 곳에 유엔반기문기념광장도 조성했다. 생가 복원에 15억원, 평화랜드 조성에 20여억원을 들였으며, 내년까지 125억원을 들여 생가 옆 2856㎡에 유엔평화관을 지을 참이다. 음성군은 2030년까지 중장기 사업으로 1천억원(민자 920억원) 규모의 반기문교육랜드 조성도 계획하고 있다.

지난 25일 충북 음성군 행치마을 반기문 총장의 생가를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다.
지난 25일 충북 음성군 행치마을 반기문 총장의 생가를 사람들이 둘러보고 있다.

25일 오후 찾은 반 총장의 음성 생가는 초가집이었다. 반 총장 부부와 이시종 충북지사, 이필용 음성군수 등이 함께 찍은 대형 기념사진이 처마 밑에 걸려 있다. 부엌엔 현장감을 살리려 짚새끼·솥·빗자루·짚신 등도 갖춰놨다. 주민 반영환씨는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온다. 최근 대선 출마 뜻을 밝힌 뒤 조금 더 많아졌다”고 했다.

반 총장 생가 옆에 있는 평화랜드는 하루 200명가량이 찾는다고 하는데, 좀 황량한 느낌이다. 반 총장 약력, 유엔 가입국 국기 등의 조형물이 설치됐다. 2㎞ 떨어진 유엔반기문기념광장에도 반 총장 흉상 등이 놓여 있다.

생가 위 보덕산 자락엔 광주 반씨 선영이 있다. 문중이 1999년 조성한 뒤 주변에 흩어져 있던 묘소들을 이곳으로 이장했지만, 1991년 교통사고로 숨진 반 총장의 아버지(반명환) 묘는 가묘로만 자리잡고 있다. 최근 한 언론이 대선 출마를 위해 반 총장 아버지 묘의 이장을 추진한다고 보도했지만 반씨 문중과 주민 모두 펄쩍 뛰었다. 임승순 행치마을(상당리) 이장은 “보덕산 중턱에 있는 반 총장 아버지 묘소가 명당이고, 이장할 계획이 전혀 없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기념으로 국수 한 그릇 정도 나누려다 말이 나올까봐 접었는데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너무 화가 난다”고 말했다. 반유환 음성군 노인회장은 “충주에 살고 있는 반 총장의 어머니(신현순씨·95살)가 돌아가시면 합장하려고 이장하지 않고 있다. 선거 때문에 이장할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라고 거들었다.

‘충청 대망론’에 들떠있지만 선거법 위반 논란도

음성의 반 총장 지지세력은 충주보다 조용히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 최근 ‘반사모 3040’(가칭)이 서울에서 창립됐다. 손인석(45·공영토건 대표)씨가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한국청년회의소(JC) 청년회장과 새누리당 중앙청년위원장을 지냈으며, 광주 반씨 대종회장인 반병열(83·서울차량공업사 대표)씨의 사위다. 반병열씨는 반 총장과 같은 마을에서 자란 ‘행치파’로 재경 음성인사 등을 중심으로 지지세를 넓혀가고 있다. 손인석 공동준비위원장은 “반 총장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을 정도로 신중한 행보를 보인다. 지금 나온 지지 모임들은 자가발전한 정도다. 반 총장이 귀국한 뒤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조금씩 조직을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에 조성된 유엔반기문기념광장에서 설치된 반 총장의 흉상.
충북 음성군 음성읍에 조성된 유엔반기문기념광장에서 설치된 반 총장의 흉상.

고향 지역에선 ‘충청 대망론’, ‘중부권 대망론’의 기가 올랐다. 엄태석 서원대 교수(행정학과)는 “대전을 뺀 충청권은 보수세가 폭넓게 자리잡고 있는데, 반 총장이 새 인물에 목말라 있는 중부권의 표를 상당 부분 차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성호 충북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적어도 충청에서 반 총장은 남북분단, 남남갈등, 지역갈등을 풀 수 있는 인물로 비치고 있다. 국내 정치를 떠나 있었지만 외교·국방·통일 관련 경험이 오히려 기성 정치권에 실망한 국민의 고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물론 신중론도 있다. 이혁규 청주교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반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 재임 시 별로 보여준 게 없다. 사상 최악의 총장이었다는 평가, 국내 정치·경제를 떠나 있었다는 불안, 도덕성, 비전 등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지난 10년간 충주·음성 모두 반기문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왔으나, 최근 반 총장이 대선 출마 뜻을 밝히자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추진한 ‘반기문 마케팅’이 계속된다면, 경쟁자에 비해 특정 후보를 편파적으로 홍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공직선거법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음성군은 반기문 생가, 평화랜드 쪽에 있던 동상을 이미 철거했다. 그동안 10차례 열린 반기문 마라톤 대회도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고광훈 음성군 행정과 주무관은 “세움 간판, 명함, 농특산물 포장 등 36가지 반기문 홍보물을 없애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충주도 반선재 주변 정비 말고 다른 사업은 줄이거나 보류하기로 했다.

시민단체 쪽에서는 주민감사 청구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자치단체가 추진했던 반 총장 관련 사업의 적정성을 따지자는 것이다. 이선영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음성, 충주 등의 반 총장 관련 사업 대부분은 주민 동의 없이 추진했다. 평가가 갈리는 생존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우상화 의혹도 있어 주민감사 청구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충북도 선거관리위원회 최인옥씨는 “반 총장은 그동안 입후보 예정자로 확정되지 않아 선거법 위반 여부를 적용하는 게 애매했다. 국제기구 대표로 있다가 대선에 나서는 경우가 처음이어서 유권해석을 하기도 쉽지 않다. 반 총장이 출마를 기정사실로 하면 관련 기준을 제시하려고 중앙선관위와 협의·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음성·충주/글·사진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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