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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서거 10주기…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등록 2019-08-18 16:30수정 2019-08-19 07:51

정치 막전막후 280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국립현충원에서 추도식
문희상·이낙연·이해찬·황교안·손학규·정동영·심상정 참석
문희상 국회의장(추모위원장)이 1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 사진
문희상 국회의장(추모위원장)이 1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공동취재 사진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아마도 김대중 대통령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했습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8월 18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저도 추도식에 참석했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가 추도사를 했습니다. 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참석해서 추모사를 했습니다.

7명의 추도사와 추모사를 부분적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듣기에는 7명 모두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 같았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 : 당신께선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조화를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최악을 피하려는 차악’을 선택할 줄 아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되었습니다. 민족 대도약의 기회를 맞아 국론을 모아야 할 정치권은 서로를 탓하며 반목과 갈등의 골만 깊어가고 있습니다. 10주기를 추모하는 오늘, 더더욱 대통령님의 빈자리가 그립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 : 대통령님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조화를 스스로 실천하시고 후대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대외정책에서도 한미동맹을 중심에 놓고, 이웃 나라들과의 우호와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조화’와 ‘비례’가 대통령님의 철학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우리가 아니고, 이웃 나라들도 과거의 그들이 아닙니다. 저희는 더 깊은 지혜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조화’와 ‘비례’의 지혜는 더욱 소중해졌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해찬 대표 : 저에게 김대중 대통령님은 정치적 스승이셨습니다. 지금도 80년 군사반란군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도 침착하게 최후진술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시던 모습, 그리고 2000년 남북 최초의 6·15 정상회담을 위해 순안공항에 내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그리움 쌓이고, 시대가 흘러갈수록 존경이 더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을 일컬어 백세지사(百世之師)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 단어에 적합한 한 분을 고르라면 아무런 주저 없이 故 김대중 대통령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교안 대표 : 김대중 대통령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화해·용서·화합·통합의 정치로 우리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재임 시절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과 찍은 한장의 사진이 기억납니다. 그 장면은 우리 국민들이 갈망하는 통합과 화합의 역사적 상징이었습니다. 정치보복은 없었습니다.

손학규 대표 : 그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반대세력의 요구에 따라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은 받는 진정한 ‘협치의 달인’이셨습니다. 자기 사람을 마다하고, 비서실장을 ‘TK 인사’로, 전 정부의 국무총리를 ‘주미대사’로, 연립정부 상대방 인사를 ‘재경부 장관’에 임명해서 정치를 안정시키고, 외교와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의회주의와 정당정치의 달인’ 김대중 대통령이 오늘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이유입니다.

정동영 대표 : 한반도가 어지럽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한반도 상공에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지정학의 비극 앞에 새삼 김대중 대통령님의 웅대한 구상과 지도력이 그립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께서는 4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변 4강을 아우르고 이끌어가셨습니다. 국제사회 지도자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존중을 받았습니다.

심상정 대표 : 대통령님께서 일찍이 제안해주셨던 승자독식 선거제도 개혁, 온몸 던져 완수하겠습니다. 국민을 섬기며 정의의 역사를 신뢰하면서 정의롭지 못한 정치, 평화롭지 않은 정치, 민생을 외면하는 정치를 반드시 바꿔내겠습니다. 그래서 대통령님께서 길을 여신 민주주의와 정의, 평화와 인권의 새 시대를 앞당길 것입니다.

추모사에 이어 신형원 교수와 제자들의 ‘당신은 우리입니다’ 추모 공연과 종교의식, ‘김대중 전집’ 헌정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추도식이 끝난 뒤 추모객들은 묘역으로 이동해 헌화하고 분향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기자인 저에게도 개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제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이름을 처음 들어 본 것은 중학교 시절(1971년~1973년)입니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2년 갑자기 학교에서 10월 유신을 교육했습니다. 유신헌법 홍보 책자는 그동안 입고 있던 옷은 서양 사람 몸에나 맞는 큰 옷이니까 벗어 던지고 우리 몸에 맞는 옷을 새로 맞춰 입는 만화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친구 중에 누군가 “김대중이라고 똑똑한 사람이 있는데 이제 큰일 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친구가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김대중과 김영삼과 이철승 얘기를 해줬습니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세 사람이 만나서 뭔가 합의를 했는데 김영삼은 헤어지자마자 “앗 속았다”고 외쳤고 이철승은 집에 도착해서야 “앗 속았다”고 외쳤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70년 세 사람이 40대 기수론으로 대선후보 경선을 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정보기관 같은 데서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무튼 어린 마음에 김대중은 똑똑하면서도 다른 정치인을 속이는 나쁜 사람이라는 인상만 갖게 됐습니다. 그 뒤로 김대중 대통령이 실제로 어떤 정치인인지 제대로 알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95~97년 한겨레 야당 1진 기자로 김대중 후보 취재

“나도 싫지만 정권교체 위해 김종필 총재와 손잡는 것”

제가 정치부 기자로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취재하기 시작한 것은 야당 1진으로 정치부 기자를 시작한 1993년입니다. 아쉽게도 그때는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영국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이기택 대표 체제였습니다. ‘김대중 사람’인 문희상 의원이 이기택 대표의 비서실장, 박지원 의원이 대변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원기 권노갑 등 동교동계가 최고위원으로 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민주당에서 정치 현안을 논의할 때는 언제나 ‘디제이의 뜻’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습니다. 디제이가 없는 상황에서 ‘디제이의 뜻’을 취재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회부로 옮겼다가 1995년 다시 정치부 야당 1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겨레 야당 1진이었던 저를 무척 자상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디제이피(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추진할 때의 일입니다. 한겨레신문에서 ‘유신 본당’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았다고 비판적 기사와 논평이 몇 차례 나갔습니다. 저와 야당 2진 백기철 기자(현 논설위원)가 김대중 대통령을 인터뷰했습니다. 이런 저런 정치 현안에 대해 답변을 마친 김대중 대통령은 제가 녹음기를 끄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본 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요. 박정희 정권 때 해직된 기자들이 한겨레신문 만들었지요? 한겨레신문이 디제이피 연합한다고 나를 자꾸 비판하는데, 해직 기자들 유신 때 참 고생 많았다는 것 잘 압니다. 그런데 나만큼 박정희 유신 정권에 당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난들 김종필 총재가 좋아서 그 사람하고 손을 잡겠습니까? 나도 싫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정권교체를 할 수 있으니까 내가 디제이피 연합을 하는 거지요.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기자에게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고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천하의 디제이’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회사에 돌아와서 편집국 간부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당론은 국가보안법 폐지였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가 당론을 대체입법으로 변경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김대중 후보가 개혁에서 후퇴했다고 기사를 크게 써서 비판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에 대해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당론 변경이 실제로 개혁 후퇴인 측면도 있었지만, 한겨레신문이 그렇게 강하게 비판해야 중도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디제이의 변화’를 인정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때의 체험으로 언론의 비판적 보도나 논평이 정치인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저도 야당 1진에서 청와대로 출입처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2000년 10월까지 김대중 대통령을 취재하고 기사를 썼습니다. 2000년 평양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도 취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제가 쓴 마지막 기사는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이었습니다. 마치 제가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하지만 곧 정치부 데스크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노벨 평화상 수상식은 취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취재한 기록을 바탕으로 2001년 10월 <디제이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호남 사람인 디제이가 대통령에 당선됐는데도 디제이 필생의 과업이었던 지역갈등 해소가 왜 안 됐는지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분석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 내용 가운데 2001년 언론사 일제 세무조사는 언론과의 결별을 각오하고 김대중 정부가 기획한 것이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이 부분을 가지고 세무조사가 언론탄압이라는 증거가 드러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전형적인 침소봉대 왜곡 보도를 한 것입니다. 입장이 난처해진 저는 <동아일보>를 상대로 정정 보도를 해 달라고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 신청을 했지만 <동아일보>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재보궐 선거가 있었고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참패했습니다. 제가 쓴 책 때문에 여당이 선거에서 진 것은 아니겠지만, 저로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무척 미안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청와대 수석을 지냈던 분에게 물어봤더니 김대중 대통령은 그 사건에 대해 ‘기자가 쓴 책을 조중동이 왜곡해서 그런 것이지 기자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고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미안한 생각을 좀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매년 1월 1일에는 꼭 동교동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2009년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시던 해에는 편집국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문했는데 마치 집안 어른이 돌아가신 것처럼 큰 상실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9년 마지막 일기 출판···“파란만장 일생 후회는 없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가 2009년에 쓴 일기가 작은 책자로 출판된 일이 있습니다. 짤막짤막한 글 모음입니다. 저는 손이 쉽게 닿는 곳에 놓아두고 가끔 펼쳐보곤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편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009년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 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2009년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2009년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 진입으로 5인이 죽고 10여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2009년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 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009년 2월 7일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009년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2009년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2009년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2009년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2009년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 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09년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2009년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살해 음모로 트럭에 치여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일기는 6월 2일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느덧 10주기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같은 큰 인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저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냥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독재, 영호남 갈등, 기득권 세력의 끊임없는 견제를 뚫고 우뚝 선 대한민국 정치사의 거목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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