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21일 오후 경기 과천 법무부 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직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오는 26일 국민의힘 전국위원회 의결을 거쳐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됩니다. 한 전 장관의 가장 큰 약점은 정치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전 장관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위기는 경험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과도하게 계산하고 몸을 사릴 때 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본다.”
한동훈 전 장관의 말 중에서 앞부분은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건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길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희망을 가지면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전 장관의 말과는 맥락이 전혀 다릅니다. 정치 경험 부족이 단점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루쉰의 소설 내용을 무리하게 가져다 인용한 것 같습니다.
지난 21일 장관 퇴임식 뒤에는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쟁투의 정치에서는 멀리 있었지만, 공공선 추구라는 큰 의미의 정치는 벌써 20년째 하고 있다. 그런 정치는 기자들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기자들은 왜 갑자기 끼워 넣는 것일까요? 한 전 장관의 주장은 정치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 때 내미는 전형적인 방어 논리이자 궤변입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2012년 대선 출마를 앞두고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을 쓴 일이 있습니다. ‘정치 경험이 없는데 대통령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치 경험 부족은 저의 분명한 약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런 반론을 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요. ‘낡은 체제’와 결별해야 하는 시대에 ‘나쁜 경험’이 적다는 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에요.”
“또 제가 비록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은 없지만 긴 기간 동안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해왔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만일 정치를 한다면 이런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한 전 장관의 논리와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정치는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일입니다. 설득하고 절충하고 양보해가며 현실을 조금씩 개선하는 지난한 작업입니다. 경험 없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특히 대통령·당대표·원내대표 등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고도의 정치 전문성과 상당한 정치 경험이 필요합니다. 정치를 보고 평가하는 것과 정치를 직접 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일입니다. 우리가 축구를 보는 안목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수준이지만, 동네 조기축구에서는 헉헉거리며 공만 따라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를 못하는 것은 정치 전문성이 없고, 정치 경험도 없고, 거기다가 정치인들의 말까지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회의원 경험이 없으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은 박정희·최규하·전두환·윤석열 이렇게 네 사람뿐입니다.
검사 경험이 없는 사람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법조 지식이 없는 사람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것을 윤 대통령이나 한 전 장관이 잘 알 것입니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20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출석을 위해 국회에 도착해 승강기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도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한 전 장관을 굳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 앉히는 이유가 뭘까요? 높은 인기 때문입니다. 한 전 장관은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이준석 전 대표, 홍준표 대구시장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여권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 체제는 당장 여당 지지층 결속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치 경험이 없어도 인기만 있으면 정치를 잘할 수 있을까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세 사람의 ‘40대 기수론’ 돌풍이 불었습니다. 세 사람은 명승부를 펼쳤고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올라섰습니다. 유진산 당수는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가 난다)라고 비웃었지만, 세 사람은 정치 문외한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이는 젊어도 20년 안팎의 경험을 쌓은 숙련된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준석 전 대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1985년생입니다. 나이 때문에 아직은 대통령 선거 출마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만치 않은 정치적 내공과 실력으로 윤 대통령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이 전 대표는 2011년 박근혜 비대위에 참여하면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12년 이상 총선 출마, 탈당, 합당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수입니다. 내공과 실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정치를 오래 한다고 누구나 다 내공과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전 대표와 비슷한 시기에 정치를 시작한 안철수 의원은 3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아직도 정치인으로서 뭔가 좀 부족하다는 인상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재능’과 ‘훈련’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치를 잘 모르면서 함부로 달려들었다가 실패한 사례로 황교안 전 대표가 있습니다. 검사 시절 주로 공안 부문에서 일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로 발탁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습니다. 그때 올라간 인기와 지지도를 기반으로 자유한국당에 입당해 2019년 2월27일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는 등 극우 강경투쟁을 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색깔론을 폈습니다. 그러나 2020년 4월15일 21대 총선에서 103석(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으로 참패한 뒤 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자신도 서울 종로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21대 총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했지만, 보수 세력한테도 외면당했습니다. 2021년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예비경선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2023년 3·8 전당대회에도 출마했는데 4위에 그쳤습니다.
그랬던 황 전 대표가 한 전 장관에게 비대위원장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지난 20일 에스비에스(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계속 말씀드리는데 한동훈 장관은 아주 탁월한 사람입니다. 꼭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할 사람인데 중요한 건 때, 때가 중요합니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요.”
“비대위원장 뭐 해봐야 6개월 합니까? 그러고 나서는 또 뭐 합니까. 만약에 그것도 혹시라도 실수하면, 실패하거나 그렇게 되면 큰 상처를 입게 되지요. 저는 그렇게 하는 건 안 맞다. 저도 처음에 당대표 나갔을 때 나중에 와라, 뭐 이런 얘기들도 있었어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황 전 대표는 윤 대통령과 한 전 장관의 검사 선배입니다. 황교안은 공안통, 윤석열·한동훈은 특수통이라는 차이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 전 대표의 충고는 한 전 장관이 따랐어야 할 것 같은데, 따르지 않았습니다.
황교안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가 2023년 2월12일 서울 여의도 황교안 후보 캠프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마무리하겠습니다. 한 전 장관이 가는 길은 전인미답의 길이 아닙니다. 거의 평생 검사를 한 사람이 갑자기 반정치주의 기류를 타고 대통령 권좌에 오르는 경로는 윤 대통령이 바로 눈앞에서 보여준 길입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통령으로서 성공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윤 대통령이 실패하면 ‘검사 대통령’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전 장관은 지금 그 위험한 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에는 한 전 장관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정성호 의원은 22일 페이스북에 “한동훈 위원장은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람이다. 술을 좋아한다는 윤석열 대통령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다. 냉철한 판단과 강력한 실행으로 여당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 그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한 전 장관이 성공할까요? 실패할까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에게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다만 대한민국 검사들이 앞으로 계속 검사 선배인 황교안·윤석열·한동훈의 길을 따라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래서입니다. 한 전 장관에게 드리고 싶은 한시가 있습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정치 경험이 없으면서도 정치 지도자의 새로운 길을 떠나는 한 전 장관에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 전 장관은 지난 21일 장관 퇴임식에서 “행운을 빕니다”라는 말로 퇴임사를 마쳤습니다. 저도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앞날에 행운을 빕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