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50
평생 핍박 무릅쓰고 3단계 평화통일론 완성
1994년 핵위기에 카터 전 대통령 방북 권유
문재인-김대중 대통령 닮아···평화 진전 기대
한미일 치열한 외교전 한반도 평화 앞당겨야
평생 핍박 무릅쓰고 3단계 평화통일론 완성
1994년 핵위기에 카터 전 대통령 방북 권유
문재인-김대중 대통령 닮아···평화 진전 기대
한미일 치열한 외교전 한반도 평화 앞당겨야
2000년 6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조 바이든 미연방 상원 외교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당시 김 대통령은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바이든 위원장에게 선물했다.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5월,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나는 모습이다.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은 ’C40 서울세계도시 기후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했다. 김대중평화센터제공
“저는 김 대통령의 재임 중 의미 깊은 순간은 평양 방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한국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의 첫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한반도 문제에 외교와 협력으로 접근한다는 그의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햇볕정책은 고립이 아닌 파트너십이 남북한 모두에게 한층 더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햇볕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 남북한의 지속적인 평화와 화해의 희망을 드높여 주었던 심대한 연대의 표현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꿈꾸었던 파트너십을 실현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더욱 안전하고 공명정대한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2010년 5월12일
김대중 자서전 표지.
<1961년>
혁신계는 장면 내각 하에서 비로소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장면 정권을 적대시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두 달 전쯤에 나는 혁신 세력에게 강력한 경고를 했다.
“자유당 시절에 혁신 세력의 보스였던 진보당의 조봉암 선생은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혁신계 여러분들도 대부분 형무소 생활을 하거나 다른 고통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때를 잊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지금의 자유를 준 것이 어떤 정부입니까. 여러분이 마음껏 누리는 자유, 그런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는 정권을 무너뜨린다면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군사 정권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 혁신 세력에게는 또다시 고난의 세월이 옵니다. 이빨을 보호해 주는 입술을 왜 찢고 있습니까.”
집권 여당의 대변인으로서 혁신 세력을 향한 경고는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혁신계 인사들은 이런 내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국제적 보장 하의 영세 중립화 통일’, ‘선 통일 후 중립화’, ‘남북 군대의 무장 해제와 외군 철수’ 등 무책임한 남북통일 정책을 주장했다. 심야에 횃불 시위를 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들의 과격한 주장과 시위는 정국의 안정을 바라며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혁신계는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으로 갈라져 민주당에 경쟁적으로 도끼질을 했다.
<1970년>
1970년 10월 16일, 나는 대통령 후보로서 기자회견을 가졌다.(중략) 나는 향토예비군의 폐지, 대중 경제 노선의 추진,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의 전쟁 억제 보장(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한의 화해와 교류 및 평화통일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교역 추진, 초중등학교의 육성회비 징수 폐지,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이중 곡가제 실시 등을 제시했다.(중략)
4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안전 보장, 그리고 남북 교류와 평화통일론 공약은 정권 유지를 위해 줄곧 한반도에 긴장을 조장해 오던 정부 여당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즉각 4대국 안전 보장론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이라는 말만 해도 성분을 조사하던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국의 국방을 외국에 맡기려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며 미치광이 짓이라고까지 공격했다. 박정희 씨가 그러한 비난의 선두에 섰다.
박 후보는 “우리의 적인 소련과 중공에게 자국의 안보를 맡기자니 무슨 소리인가? 국가의 기본인 반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이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내 주장을 비틀어 선전했다. 그러나 4대국 안전 보장론의 핵심은 국방을 4대국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었다. 4대국이 한반도를 차지하고자 청일·러일 전쟁 같은 위험한 도발을 하지 않고, 또 남과 북을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4대국에 일종의 불가침 조약을 요구한 것이었다.
내 주장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그때 4대국과 남북한을 합친 것이 이른바 훗날에 ‘한반도 핵위기’를 해결하려는 6자 회담이 아닌가. 이는 당시나 지금이나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역학관계와 그 실체는 변함이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나는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논리와 진정한 평화의 요건이 무엇인지를 간파했다. 그때 내세운 논리는 지금 생각해도 한 치 어긋남이 없다. 바르게 판단하고, 옳게 행동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남북 교류와 평화통일 정책에 대해서도 공화당 측에서는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북한이 무력통일을 획책하고 있는데 그들과 어찌 화해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박 대통령과 김종필 씨 등은 연일 내 발언이 용공적이라고 규탄했다. 대놓고 국민들을 자극했다.
‘김대중이가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가 북을 치면 김대중이가 장단을 맞춘다.“
<1972년>
나의 3단계 통일론은 오랜 구상 끝에 나왔다. 박 정권이 반공과 멸공을 내세우던 상황에서 나의 3단계 통일론은 지금 생각해도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해 숱한 탄압과 음해를 받았지만 가장 합리적인, 가장 평화적인 통일 방안으로 훗날 국민들의 지지와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다. 나는 국내외 전문가들과 토론하고 국제 정세의 흐름을 분석했다. 3단계 통일론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에서는 평화 공존을 위해 동족끼리 전쟁을 않는다고 약속하고, 동시에 긴장 완화를 위해 쌍방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고 했다. 서로가 상대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여 비방을 중단하고, 다시는 청일·러일 전쟁 같은 한반도를 무대로 한 강대국들의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중소일의 부전(不戰) 협정을 이끌어내고, 그런 연후에 남과 북이 국제 사회에서 상호 공존함을 인정받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4대국의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 억제 보장과 함께 북한의 유엔 출석, 그리고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남한이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북한은 도쿄나 워싱턴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등의 동시 외교도 촉구했다.
제2단계는 평화적 교류의 확대이다. 기자 교류나 문화·예술·스포츠 교류를 앞당기고, 서로의 방송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경제적 교류는 한 가지씩이라도 단계적으로 실질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남북 교섭이 성공하고, 남북의 민족애와 신뢰가 회복되고, 그럼으로써 완전 통일에 대한 민족적 합의가 성취되면 비로소 마지막 3단계인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밝혀 온 통일에 관한 일관된 입장이었다.(중략)
박 정권은 나의 3단계 통일론에 무수한 흠집을 내며 나를 공격했다. 박정희와 공화당, 그리고 일부 언론은 나의 주장을 비틀어 소개하면서 용공 분자나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나의 평화 통일론은 이후 박 정권이 납치, 연금, 구속 등 박해와 탄압을 할 때 주요 빌미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나는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나의 3단계 통일론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이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이 변한 탓도 있지만, 끊임없이 바람직한 통일 방안을 모색했던 연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3단계 통일안을 보완하여 ‘공화국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이 방안 역시 ‘평화 공존 교류→연방→완전 통일’이라는 3단계로 이뤄졌다.
1단계인 상징적 연방 기구 아래의 공존 교류는 실질적으로는 남북 연합 단계를 의미한다. 남과 북에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독립 정부가 외교·내정·군사적인 독자성을 유지하고, 연방 정부는 상징적 기구로 평화 공존과 교류를 관장한다. 2단계의 연방 단계는 연방 정부가 외교·국방·주요 내정을 관장하고, 남북에 지역 자치 정부를 둔다. 3단계는 평화적 공존과 교류의 토대 위에 평화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이전의 통일론과 달라진 점은 남북이 기존 권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각기 독립 정부로 존재하면서 양측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된 상징적인 연방 기구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나는 수감 생활과 망명 또는 연금 등이 탄압 속에서도 통일 문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떤 고난의 시간에도 우리 민족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요 가장 순결한 과제인 통일에 관해서 숙고를 거듭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재가 있으면 찾아가 의견을 구했다. 보고 또 보고, 묻고 또 물었다.
1995년 8월에 펴낸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에 지난 30여년 동안 숙성시킨 통일 방안을 정리해 담았다. 거시적 담론을 실천적 방안으로 구체화했다. 그것은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 아래 1단계는 남북 연합, 2단계는 남북 연방, 3단계는 완전 통일에 이르는 것이다.
남북 연합 단계에서는 남과 북이 독립 국가로서 주권과 모든 권한을 보유한 채 남북연합정상회의, 남북연합회의, 남북연합각료회의 등 협력 기구를 설치하고, 이들 연합 기구는 3대 행동 강령인 평화 공존·평화 교류·평화 통일을 실천하는 임무를 맡는다.
연방 단계에서는 연방 정부는 외교·국방·중요한 내정권을 보유하고, 연방 대통령·연방 의회를 구성하며, 남과 북에는 지역 자치 정부를 두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전 통일 단계에서는 중앙 집권제를 실시하거나 세분화된 연방을 두는 것이다. 통일 국가의 이념과 체제는 당연히 민주주의, 시장 경제, 도덕적 선진국,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94년>
1994년 6월은 남과 북, 그리고 미국에게 악몽과 같았다. 시간은 흡사 시한폭탄을 향해 타들어 가는 불꽃처럼 그렇게 흘러갔다. 핵 문제와 일괄 타결에 실패하자 북한은 미국의 경고를 묵살했다. 핵연료봉 추출을 강행했다. 외교적 노력이 실패했다고 판단한 미국 펜타곤은 핵 시설에 대한 무력 사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영변 지역을 겨냥한 정밀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정 지역에 정밀 공격을 한다지만 이는 전면전이 될 것이 뻔했다.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면 3개월 안에 미군 5만 2000명, 한국군 49만명, 민간인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펜타곤은 예측했다. 산업 시설 또한 대부분 파괴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금지선(red line)을 넘은 북한의 핵 개발은 즉각 저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영변 핵 시설에 대한 공격을 뜻했다. 곧장 클린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안보회의에 3단계 작전 계획을 상정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이때 북한을 방문 중인 카터 전 대통령이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김일성 주석과 카터 전 대통령은 주목할 합의를 도출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핵 공격의 위협을 제거한다면 북한은 핵 개발을 동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은 내가 건의했다. 나는 1994년 5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을 통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내 나름의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이 엔피티(NPT)를 탈퇴한 지 1년이 넘었고 북한 핵 문제는 점점 위험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북한과 미국은 매우 위험한 ‘핵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기조연설에서 전에 주장했던 일괄 타결 방안을 다시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북한과 미국은 두 가지씩을 서로에게 양보해야 합니다. 북한은 핵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남쪽의 안보를 보장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과 외교를 통해 경제 협력에 나서고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는 등 북한의 안보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김일성 주석과 대화가 가능한 인물을 평양에 보낼 것을 제안했다.
“나는 미국이 국제적으로 존경받고 특히 중국과 북한에서 신뢰를 받으며 클린턴 대통령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원로 정치인을 북한에 보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 파견은 중국과 북한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기조연설이 끝나자 곧 질문이 들어왔다.
“김 이사장께서 특사로 가장 적임자라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면 거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회견이 있기 전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전날 카터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직접 설득했다.
“내일 연설에서 당신을 거명하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만일 북한에 가게 되면 사전에 나의 조언이 필요하다며 방북 전에 꼭 나를 만나 보겠다고 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여당인 민자당 당직자들이 차례로 나서서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렸다.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내 발상 또한 터무니없다며 몰아붙였다.
그러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의 연설은 미국을 움직였다. 내 연설은 케이블 텔레비전으로 두 번, 세 번 방영되었다. 미국은 내 제안을 심도 있게 검토하며 북한을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마침내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받아 6월 15일부터 사흘간 북한에 머물렀다. 그리고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중요한 합의를 끌어냈다.
<1995년>
훗날 남북 화해 협력을 상징하는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199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사용했다. 미국 보수 진영의 정책 산실로 알려진 헤리티지(Heritage) 재단의 초청 연설에서였다. 연설의 주제는 “강한 의지에 입각한 태양 정책”이었다. 당시에는 ‘햇볕’이 아닌 ‘태양’으로 지칭했다. 나는 태양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은 침략이나 영토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태양 정책’을 적용한 곳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강풍 정책’만을 적용한 데에서는 전체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전자의 예는 소련, 동유럽, 중국 등이고 후자의 경우는 베트남, 쿠바, 북한 등입니다.
태양 정책의 최근 성공 사례는 제네바 합의문입니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아무런 해를 끼치거나 대결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김정일 정권이 안정되고 경제 위기로부터 조속히 회복할 것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따뜻한 태양 빛 아래 그들과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고, 공동 번영과 민족 통일의 길로 함께 나갈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미 양국이 모두를 위해 태양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연설에서 처음 사용한 태양 정책은 그 뒤 ‘햇볕정책’으로 불리게 되었고, 중국은 ‘양광(陽光) 정책’, 일본은 처음 명칭 그대로 ‘태양(太陽) 정책’이라 쓰고 있다.
햇볕 정책과 더불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도 아태평화재단에서 치열한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중략)
우리는 1995년 8월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남북 연합을 중심으로>라는 책을 출간했다. 내가 30년이 넘게 숙성시킨 통일 정책의 결과물이며, 각 분야 100여 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만든 땀의 결정체였다. 나는 책머리에 이렇게 썼다.
“해방 50년의 감격이 분단 50년의 회한과 교차되는 이때에, ‘3단계 통일론’을 민족 앞에 내어 놓으니 만감이 스쳐 간다. 이제야 민족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게 되었다. 지난 25년간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고 그려 온 통일화(統一畵)의 중요한 결실이다. 이제 통일로 가는 길의 설계 도면은 우리 손에 쥐어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지난 날들을 펼쳐 보니 모두 아름답다. 나의 자서전은 미래 세상의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백성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모두 평화롭기를 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4월 당시 광주 충장로 들머리에서 유세차량에 올라 지지를 호소한 뒤 지지자가 선물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광주/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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