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기대하는 대선 국면에서
권력자들이 쏟아낸 망언과 멸칭
소수자 고통의 서사는 외면하고
증오·파괴로 ‘우리 편’만 결집해
권력자들이 쏟아낸 망언과 멸칭
소수자 고통의 서사는 외면하고
증오·파괴로 ‘우리 편’만 결집해
[한겨레S] 이라영의 비평
권력자들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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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사학의 차이는/ 자신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기 아이들을 죽이는 대신에”
오드리 로드의 시 ‘힘’은 시와 수사학의 차이를 말하며 시작한다. 로드는 도대체 무슨 뜻으로 시와 수사학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까. 게다가 자기 아이들을 죽이는 대신에 자신을 죽일 준비는 어떤 의미인가. 이 시는 1973년 열 살짜리 흑인 소년을 경찰이 총으로 살해한 사건을 다룬다. 법정에서 경찰은 이렇게 변호했다. “몸집이라거나 다른 건 눈치채지 못했어요. 오직 피부색만.” 소년을 살해한 백인 경찰은 무죄로 풀려났다.
힘은 여러 의미가 있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죽이는 힘을 발휘하거나. 경찰이 법정에서 발휘한 수사는 인종차별적 사회에서 힘을 발휘했다. 오직 피부색만. 그 피부색은 죽여도 되는 색깔이다. 특정 정체성만 강조하고 명명함으로써 모든 상황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게 된다.
적과 희생양 설정한 권력의 수사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1일 1망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 계속 문제가 되는 사람이지만 역대 어떤 대선 후보보다도 말을 기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후보와의 토론을 꺼리고, 프롬프터가 없어 연설을 하려다가 2분간 아무 말도 못한다. 문장을 말하고 문단을 구성할수록 말이 문제가 된다. 그런 윤 후보는 최근 페이스북에 단 몇 단어만 적는 것으로 쇄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성범죄 처벌 강화’, ‘무고죄 처벌 강화’, ‘여성가족부 폐지’, ‘병사 월급 200만원’, ‘주적은 북한.’ 이 흐름 속에서 ‘멸공’은 덤이고, ‘달파멸콩’(문재인 대통령과 친문 세력을 연상시키는 ‘달파’ 용어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언급한 ‘멸공’ 주장을 연상시키는 말)은 부산물이다. 병사 월급 200만원은 바람직한 정책이지만 여가부 폐지를 언급한 직후에 이 정책을 말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점이 문제다.
전쟁은 명확한 적과 희생양이 필요하다. 국민의힘은 시대착오적이게도 ‘공산당과 페미니즘’을 바로 그 적으로 설정했다. 과거에 ‘빨갱이 물이 든다’는 말은 오늘날 ‘페미 묻었다’로 바뀌어서 사상검증의 다른 형태를 이어간다. 인간에게는 세계를 각각의 대립쌍(여성·남성, 보수·진보, 공산주의자·자본주의자 등)을 통해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이런 극단적 설정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이준석 대표가 습관처럼 말하는 “무운을 빕니다”에서 보듯 선거를 전쟁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아군과 적군의 경계는 흐릿해서는 안 된다. 선명하게 경계를 긋고, 경계선은 바로 전선이 된다.
이 전쟁에서 언어의 무기는 중요하고, 정치인들이 나름 젊은 세대(라고 부르는 남성)를 결집시키기 위해 꺼내든 ‘신식 무기’는 밈이다. 에스엔에스는 이 무기를 휘두르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영토다. 에스엔에스는 소통이라는 환상을 제공하는 한편, 차단과 조롱이 범람하는 장이기도 하다. 맥락은 실종되고 대화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어 끝도 없이 조롱할 수 있다. 성급하게 판단하기 일쑤다. 긴 문장보다 자극적인 단어의 반복이 효과적이다. 트위터에서 짧은 몇 마디로 정치하던 트럼프처럼 윤석열도 에스엔에스를 활용한다. 반려견을 이용한 일명 ‘개 사과’, 남친짤, 멸공챌린지 등을 그렇게 이어갔다. 새 시대를 만들려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만 새 술은 없고 새 부대는 어설프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젊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담을 수 있는 내용은 먼지 가득한 낡은 ‘멸공’과 안쓰러울 정도로 붙들고 있는 불안한 ‘남성됨’(manhood)이다.
그들은 왜 듣지 않는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난 11월 남성 커뮤니티에 올라온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춰달라”는 주장이 담긴 글을 선대위에 공유했다. 이 후보는 “청년의 절규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어떤 청년을 말하는가. 현재 여야를 막론하고 남성 커뮤니티의 언어가 정치권으로 옮겨지며 듣기의 불균형이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해 말 이 후보가 <시비에스>(CBS) 유튜브 채널 씨리얼 출연을 번복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청소년, 여성, 장애인, 산재 노동자, 돌봄 노동자 등 사회 곳곳 약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방송을 일부 지지자들이 “페미 성향”이라며 반대한 뒤 일어난 일이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소수자의 목소리든 ‘페미니즘’이라고 규정하기만 하면 들을 필요 없다는 인식을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심어준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역사학자 린 헌트는 인권운동이 서사적 실천의 발전으로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이후 소설을 읽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보통 사람들이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깝지 않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고 본다. 헌트의 주장을 비판하는 입장도 있으나 미학과 윤리학은 꽤 상관관계가 있다.
나는 미적 표현과 보편적 윤리를 연결시키는 것에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주의해서 본다. 이야기를 짓는 능력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보면, 타인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실제로 윤리적 변화를 만든다. 지배 담론을 벗어난 소설이나 영화에 누리꾼들이 집단적으로 별점 테러를 벌이는 태도가 사소해 보이지만 이는 저항 담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이다. 때로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연민을 정치화하는 힘을 길러준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지배 권력은 소수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외면한다. 대신 망언을 하고 멸칭을 만들고 극단적 어휘를 사용한다. 자발적으로 표현의 능력을 퇴행시키는 ‘표현의 자유’의 범람이다.
다시, 오드리 로드는 평소에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을 시라고 말해왔다. 권력의 수사학이 증오하고 파괴하기를 통해 ‘우리 편’을 결집시킨다면 로드에게 시는 사랑하고 창조하는 대항언어다. 현재 난립하는 언어들은 창조하는 시가 아니라 파괴하는 수사로 작동한다. 동사가 사라진 명사의 나열은 “오직 피부색만” 강조하던 차별의 언어처럼 명명하는 권력을 한껏 과시하는 행위다. 고통의 서사를 들을 것인가, 고통을 외면하는 언어에 호응할 것인가.
권력자들의 언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지난 8일 서울 동작구 이마트 이수점에서 장을 보고 있다. 국민의힘 선대위 제공
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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