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4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 인선을 직접 발표한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는 국무총리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 국가인데도 총리가 있습니다. 헌법에 의원내각제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총리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무총리는 이범석 총리였습니다.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습니다. 대통령·부통령에 이어 3인자였습니다. 총리는 대통령과 함께 국책 의결 합의체 국무원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습니다. 총리의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은 1952년 개헌 때 들어갔습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의원내각제가 되면서 국무총리는 행정부 수장으로 올라섰습니다. 장면 총리가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63년 3공화국 헌법이 다시 대통령제를 채택하면서 총리는 행정부 2인자가 됐습니다. 대통령이 임명했지만 국회의 승인은 받지 않았습니다. 국무위원 제청권, 해임건의권이 있었습니다. 1972년 유신헌법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조항이 들어갔습니다.
총리는 대통령 유고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오히려 빛나는 특이한 자리입니다. 1960년 4·19 혁명 뒤 허정 총리 겸 외무부 장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뒤 최규하 총리,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뒤 고건 총리, 200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뒤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습니다. 일시적이지만 국가의 원수요, 행정부 수반이요, 군통수권자라는 권좌에 올랐습니다.
평상시에는 총리가 별로 빛이 나지 않습니다.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대신 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독 총리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대통령 대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므로 민심 수습을 위해 언제든 물러날 각오로 일해야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서열은 높지만, 권력은 약한 자리가 총리입니다.
그렇다 보니 대통령이 총리 인선을 할 때도 능력과 함께 정치적 상징성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약점을 보충해주는 보완재 인선이 많았습니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후 첫 번째 총리 인사를 보면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군 출신 노태우 대통령의 첫 번째 총리는 이현재 전 서울대 총장이었습니다.
“마침내 총리 후보가 3~4명으로 압축되었다. 올라온 자료들을 검토해 보니 모두 훌륭한 분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원칙 하나를 정했다. 안타깝더라도 내 고향인 대구·경북 출신은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제6공화국의 초대 총리로 이현재 전 서울대 총장을 내정하고 나와 홍(성철) 실장이 그를 만나 승낙을 얻어 냈다.”
“총리 인선에는 능력과 출신지도 고려했지만, 중후한 인품과 덕성을 따진 결과 몇 분의 후보가 나왔다. 그 가운데는 총리직을 고사한 분도 있었다. 결국 이현재 씨를 국무총리로 선정했는데 퍽 만족스러웠다. ‘우(遇) 대통령에 현(賢) 재상’이라 궁합이 꼭 맞는 셈이었다.”(2011, 노태우 회고록)
김영삼 대통령의 첫 번째 총리는 호남 지역구의 황인성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영호남 지역 갈등을 고려한 인선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좀 특이한 경우입니다. 디제이피 연합으로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국무총리’를 공약하고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런데도 거대 야당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오랫동안 임명 동의를 거부했습니다.
“3월 2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을 위해 국회가 열렸다. 나와 조순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 2월 27일 오찬 회동을 갖고 표결 처리에 합의한 바 있었다. 조 총재는 거듭 김종필 총리의 지명 철회를 요구했다. 내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자민련과의 연합은 국민과의 약속이었고, 자민련과의 합의를 깨는 것은 배신행위입니다. 김 총리 지명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투표에 참여해서 반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음은 온통 국회에 있었다. 나는 특별한 일정도 잡지 않고 국회 쪽을 살폈지만 비관적인 상황 보고만 올라왔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표결에는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백지 투표를 했다. 이를 감지한 여권 의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져 끝내 투표가 중단되고 말았다. 나는 매우 상심했다. 이것은 대통령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정치적인 의사 표시였다.
결국 나는 결심해야 했다. 거대 야당에 떠밀려 다닐 수는 없었다. 3월 3일 김종필 총리서리 체제를 출범시켰다. 퇴임을 하루 앞둔 고건 총리의 제청으로 17개 부처의 조각을 마무리 지었다. 고 총리가 진정 고마웠다.”(2010, 김대중 자서전)
노무현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의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를 발탁했습니다. 그 이유를 노무현 대통령의 참모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각에서 파격적 발탁이 많다 보니, 국무총리 인사는 선택폭이 좁아졌다. 당선인은 조각의 파격성 자체에 대한 염려는 없었지만, 그로 인한 언론이나 한나라당으로부터의 공격을 염려했다. 그 때문에 총리는 일종의 안전판 역할을 해 줄 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김원기 전 의원 등이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당선인은 의외로 고건 전 총리를 선택했다. 물론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참여정부 정체성과 너무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참모들 사이에 많았다. 그러나 당선인은 선택의 문제라고 말했다. 만약 총리를 그런 방향으로 하지 않으려면, 조각의 파격성을 완화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2011, 문재인의 운명)
여기서 잠깐 고건 총리 얘기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고건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의 마지막 총리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마지막 개각 때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행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뒤에는 김종필 총리 후보자가 국회 임명동의를 받지 못하자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으로 김대중 정부의 새로운 장관들을 제청해줬습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첫 번째 총리로서 제청권을 행사했습니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로 인한 직무정지에서 돌아와 장관 제청을 요청했지만 “물러가는 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부했습니다. 참 특이한 이력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승수 총리를 기용했습니다. 인선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누구보다 글로벌 마인드를 갖고 있고 다양한 국내외 경험이 있다. 국제적 경험과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우리가 지향하는 경제를 살리고 통상과 자원 외교를 할 수 있는 가장 적격자로 생각했다. 새 정권이 지향하는 국민화합 차원에서도 매우 적합한 인물이다.”
한승수 총리는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하다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 상공부 장관, 주미대사, 대통령 비서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13·15·16대 국회의원도 했습니다. 화려하지요?
박근혜 대통령의 선택은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김용준 인수위원장이었습니다. 박근혜 당선자가 직접 밝힌 인선의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 법관으로서 국가의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확고한 소신과 원칙에 앞장서온 분이다. 나라의 법치와 원칙을 바로 세우고 무너져내린 사회 안전과 불안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고 사회적 약자가 보호받는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갈 적임자다.”
그러나 김용준 후보자는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거지며 5일 만에 낙마했습니다. 박근혜 당선자는 며칠 뒤 정홍원 전 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영 인수위 부위원장이 발표했습니다.
“그간 공직자로서 높은 신망과 창의 행정 구현의 경험, 그리고 바른 사회를 위한 다양한 공헌을 고려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확실히 법조인들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택은 호남 출신으로 정치 경험이 풍부한 이낙연 총리였습니다. 역시 보완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윤석열 당선자가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를 지낸 한덕수 전 총리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요?
“정파와 무관하게 오로지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정의 핵심 보직을 두루 역임하신 분이다. 민관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각을 총괄하고 조정하면서 국정 과제를 수행해 나갈 적임자다.”
한덕수 후보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오이시디 대사,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경제수석, 산업연구원장,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지원위원장, 국무총리, 주미대사, 무역협회장,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어마어마하지요?
윤석열 당선자로서는 한덕수 후보자가 전북 출신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고위 공직을 맡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임명동의를 반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정무적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에게 한덕수 후보자에 대한 평판을 물어보면 좀처럼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김대중 정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기만 전 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이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덕수 불가론을 여러 차례 썼습니다. 너무 길어서 내용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덕수 후보자가 과거 이명박 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한승수 총리와 무척 많이 닮았다는 점입니다. 이름만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한승수 총리는 경제와 통상 분야 전문가였습니다. 한덕수 후보자도 그렇습니다. 한승수 총리는 역대 정권을 넘나들며 고위 공직을 섭렵했습니다. 한덕수 후보자도 그렇습니다. 한승수 총리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정부에 들어가 국가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한덕수 후보자는 “국가가 원한다면 봉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앤장이라는 치명적 공통점도 있습니다. 한승수 총리는 총리를 하기 전에 김앤장 고문을 했고 총리를 마친 뒤에도 다시 김앤장 고문을 했습니다. 한덕수 후보자도 그렇습니다. 2017년 12월부터 최근까지 4년 4개월 동안 김앤장에서 19억7748만원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총리를 하고 난 뒤에는 또다시 김앤장 고문으로 돌아갈까요? 무척 궁금합니다. 고위 공직과 로펌 로비스트를 오가는 대한민국 공직 사회의 도덕적 파탄을 우리가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요?
2008년 7월 저는 ‘한승수 총리의 달콤한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일이 있습니다. 칼럼을 읽은 한승수 총리가 전화로 “내 인생이 그렇게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덕수 후보자의 인생도 한승수 총리 못지않게 달콤하고 화려한 것 같습니다.
이번 한덕수 후보자 인선은 윤석열 당선자에게 우호적인 이른바 보수 언론도 탐탁지 않게 보는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 4월 4일 치 사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 후보자의 선택을 마냥 흡족해하는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 정부의 첫 인선인 만큼 윤 당선인이 새 시대를 알리는 신선한 인물을 발탁해주길 바라는 국민의 변화 욕구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 사회의 도약을 주도하는 20·30세대와 교감하며 정책을 총괄하기엔 시대 감각이 맞겠느냐는 말도 나온다.”
<동아일보> 4월 5일 치 사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윤석열 새 정부의 한덕수 국무총리 카드를 놓고 한편에선 ‘올드보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검찰 외엔 국정 경험이 부족한 윤 당선인을 도와 초대 내각을 안정적으로 이끌 풍부한 경륜과 역량을 갖췄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할 진취적 리더십과는 거리가 있지 않느냐는 얘기다. 이는 73세의 나이 문제만은 아니다.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굳어진 관리형 이미지 탓도 있다.”
어쨌든 한덕수 후보자가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언론의 검증과 국회 인사청문회 등을 거치면서 차차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두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첫째, 한덕수 후보자가 윤석열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라는 가치에 걸맞은 인물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의혹만 봐도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둘째, 한덕수 후보자가 국무총리가 되면 윤석열 당선자의 중요한 대선 공약인 ‘총리 및 장관 자율성-책임성 확대’는 지키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총리나 장관의 자율성과 책임성은 관료 출신이 아니라 정권 내부의 지분을 가진 실세 정치인이 할 때 훨씬 강해집니다. 김대중 정부의 김종필 총리, 노무현 장관이 그랬고, 노무현 정부의 이해찬 총리, 유시민 장관이 그랬습니다.
저는 윤석열 당선자가 안철수 인수위원장, 권영세 부위원장, 원희룡 기획위원장, 권성동 장제원 의원 같은 정치인을 국무총리로 발탁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척 아쉽습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