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9월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볼링에서 5번 핀을 의미하는 킹핀은 본래 밀림에서 벌목 작업을 할 때 쓰던 말이라고 합니다. 잘라낸 나무들을 강물에 띄워 하류로 보내는데 굽이에서 나무들이 엉켜서 멈추면 킹핀을 찾아서 흔들어 나무들이 다시 강물을 따라 흘러가게 해줘야 합니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 수 있는 해법을 킹핀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정국이 뒤엉켜서 아예 멈춰버렸습니다. 여야 관계는 점점 더 꼬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과 대화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검찰과 경찰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말 그대로 탈탈 털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대결도 점입가경입니다.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이 구성한 국민의힘 지도부는 미생(未生)입니다.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나와봐야 생사를 알 수 있습니다.
꽉 막힌 현 정국의 킹핀은 무엇일까요? 저는 국민의힘 원내대표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배배 꼬인 정국의 한가운데 늘 권성동 원내대표가 있었습니다. 등장부터 문제였습니다. 지난 4월 윤석열 당선자가 원내대표 유력 후보였던 김태흠 의원을 충남지사 출마로 돌려세우면서 권성동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됐습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박병석 국회의장 중재로 검찰 수사권 조정에 합의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반대로 돌아서자 합의를 번복했습니다. 집권여당 원내대표의 합의 번복은 이후 정국 경색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합의 번복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권성동 원내대표의 태도였습니다. 집권여당 원내대표는 본래 수비수입니다. 야당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협상과 타협을 끌어내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국회는 절대적인 여소야대 지형입니다. 소수 여당 원내대표가 야당을 자극하는 공격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해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권성동 원내대표는 민주당을 거침없이 공격했습니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 북한 어민 북송 사건 등이 불거졌을 때 문재인 정부 비판에 가장 먼저 나섰습니다.
검찰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소환한 것에 대해서도 ‘범죄와의 전쟁’이라며 이재명 대표를 범죄자로 몰았습니다. 페이스북에 이런 글들을 썼습니다.
9월3일
“민주당은 대선 경선 및 대선 직후, 올해 보궐선거 직전, 당대표 선거 등 정치인 이재명과 ‘손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습니다. 그 결과 민주당은 정치인 개인의 정치적 인질로 전락하여, ‘전쟁입니다’ 말 한마디에 정치적 옥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 나오면, 이재명 대표의 의원직 박탈은 물론, 민주당은 선거보전비용 434억원을 반환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패당망신’(敗黨亡身)입니다.”
9월14일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이렇게 많은 범죄 의혹을 안고 선출된 야당 대표가 있었습니까? 범죄 혐의가 있으니 수사를 받는 것입니다.”
“이재명 대표가 정말 민생을 위한다면 당대표부터 사퇴하시고 성실하게 수사에 협조하십시오.”
“정적 제거 역시 무리한 레토릭입니다. 법에 따라 권력자의 범죄 의혹을 밝히는 목적은 정적이 아니라 도적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9월21일
“7대 입법은 이재명 대표의 정치적 위기를 포퓰리즘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대표는 온갖 범죄 의혹을 방탄하기 위해 당 대표가 되어서 민주당 자체를 정치적 인질로 삼더니, 이제는 거대 의석으로 국가 재정을 인질로 잡으려고 합니다.
민주당에 경고합니다. 사법 리스크로 얼룩진 당 대표를 위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국가 재정까지 파멸시킨다면 공당이 아닌 공적(公敵)이 될 것입니다.”
권성동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가 9월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어떻습니까? 말 한마디 한마디, 표현 하나하나가 민주당 의원들과 이재명 대표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비판이 아니라 저주와 독설에 가깝습니다. 권성동 의원은 왜 이러는 것일까요? 4월5일 원내대표 출마 선언문에 단서가 있습니다.
“제가 원내대표가 된다면, 집권여당으로서 민주당을 압박할 수 있는 부분은 강력하게 압박하고, 현실적으로 추진이 어려운 부분은 철저하게 국민에게 호소하겠습니다.
쟁점 현안에 있어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겠습니다.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로서 책임감 있고 안정적인 모습을 국민께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과거와 같이 막무가내식 국회 운영을 한다면 결기 있게 맞서겠습니다. 모든 원내 전략은 대국민 여론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권성동 의원은 처음부터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할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론전에서 승리해 민주당을 굴복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및 취임 이후 여야 관계가 강 대 강으로 치닫게 된 결정적 원인이 바로 권성동 원내대표였던 셈입니다.
권성동 원내대표의 대야 초강경 전략 전술은 성공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정치가 그렇게 쉬우면 아무나 해도 되겠지요. 권성동 원내대표의 무리한 행보는 여야 관계보다 여권 내부에서 먼저 사달이 났습니다. 이준석 대표를 무리하게 쫓아내려다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려 원내대표직을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사필귀정입니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물러나고 새로 주호영 원내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일단 여권 내부의 혼란은 정리돼가는 분위기입니다. 법원이 이준석 대표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정진석 비대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의원총회에서 선출된 주호영 원내대표의 지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거나 합법적으로 새로운 비대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여야 관계도 조금씩 풀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일 원내대표 경선에서 당선된 직후 주호영 원내대표는 “최우선 과제로 위기의 당을 안정화하고 정기국회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외연을 확장하고 국민통합에 힘을 기울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임자와 달리 ‘외연 확장’과 ‘국민통합’을 다짐했습니다.
정치는 가끔 오묘하게 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주호영 의원을 비대위원장에 이어 원내대표로 세우는 데 가장 앞장선 사람은 바로 권성동 원내대표였습니다. 이른바 ‘윤심’까지 파는 바람에 국민의힘 의원들의 반발심을 자극했고 주호영 원내대표의 표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주호영 원내대표는 전임자와 매우 다른 정치인입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경북 울진 바닷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 경상중학교와 불교종립 능인고, 영남대를 나왔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15년 동안 판사를 했습니다. 2004년 17대 총선부터 대구에서 다섯차례 당선된 5선 국회의원입니다. 저는 주호영 의원이 초선일 때부터 가끔 그를 봤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점잖은 사람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여러차례 물의를 일으킨 욕이나 비속어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술을 아주 잘 마셨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도 없습니다.
그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좀처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불자와 법관의 삶이 그런 인품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2020년 5월 야당이었던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됐을 때 그는 벽에 ‘인묵’(忍默)이라는 글을 써 붙인 일이 있습니다. ‘참을 인’에 ‘잠잠할 묵’입니다. 180석 거대 여당에 맞서 장외투쟁을 하지 않고 원내에서 끝까지 참으며 싸우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원내대표 임기 후반기에는 ‘설해목’(雪害木)이라는 글을 써 붙였습니다. 아무리 가벼운 눈이라도 쌓이면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묵과 설해목, 두가지 다 주호영 원내대표의 온화하면서도 묵직한 성품을 잘 표현하는 글인 것 같습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가 9월21일 국회 본청 원내대표실을 예방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지난 21일 주호영 원내대표가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를 찾아가서 인사했습니다. 박홍근 원내대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야는 어찌 보면 한 강물을 먹는 그런 파트너다. 적이 결코 아니다. 같이 마시는 그 물에 독극물을 풀어선 안 된다. 서로 경쟁할 건 경쟁하면서도 타협할 건 타협하는 지혜와 경륜이 필요하다. 인품이 뛰어난 주 대표님과 함께 풀어가고자 한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민주당이나 민주당 의원님들의 애국심이나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도 저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 논의하고 얘기하고 하다 보면 좋은 결론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 “제가 귀가 좀 커서 남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하던데 우리 민주당 말씀에 정말 귀를 기울여서 경청하고 수용하겠다.”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넘어서는 훈훈한 덕담이 오고 간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정당은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여야가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갈등을 조정하고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 정치의 본질입니다.
인내의 정치인, 귀가 큰 정치인 주호영 원내대표 취임을 계기로 이번 정기국회에서 여야가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활짝 꽃피우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야 정치가 민생을 살리고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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