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7월 22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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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9월24일 밤이었습니다. 9월26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한덕수 국무총리와 주례회동을 했습니다. 27일에는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세종시 어린이집도 방문했습니다.
28일에는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제8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했습니다. 29일에는 방한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을 만나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제외하도록 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우려를 전달하고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30일에는 은행회관에서 제3차 거시금융상황점검회의를 했습니다.
10월1일에는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날 기념식에 참가해 연설했습니다. 4일에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미 스타트업 서밋과 케이(K)브랜드 엑스포 참여 중소·벤처기업 오찬 간담회’를 했습니다. 5일에는 경북 상주에서 제9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했습니다. 6일에는 재향군인회 창설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오후에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통화했습니다. 7일에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제10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 고학수 개인정보보호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오후에는 울산에서 열린 중앙지방협력회의와 전국체전 개회식에 참석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윤석열 대통령은 하루도 빠짐없이 중요한 일정을 소화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일정이 유난히 많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이런 활동은 우리의 기억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뉴스에 파묻혔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뉴스’는 대부분 윤석열 대통령 자신이 만든 것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6일 아침 출근길 약식 회견에서 ‘비속어 논란’에 대해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것은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폭탄’을 던졌습니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9월30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취임 뒤 최저치로 떨어졌습니다. 10월3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4주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습니다.
4일부터 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되면서 여야 공방이 격화됐습니다. 그 전에 감사원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서면 조사를 통보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만평(<윤석열차>)을 전시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혀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습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해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을 자극했습니다. 우리 군이 동해로 발사한 현무 미사일은 방향을 잃고 군부대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는 이준석 전 대표 당원권 정지 1년을 추가 의결했습니다.
대형 뉴스가 하도 많아서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러니 윤석열 대통령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통령이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잡는 악재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일 것입니다. 자신은 정치적 논란이 벌어질 만한 사안은 가급적 피하고 경제와 민생 행보에만 주력하고 있는데 영 힘이 실리지 않으니 말입니다.
7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는 29%로 일주일 전 24%에서 5%포인트 올라 반등했습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위기감을 느낀 고정 지지층이 결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됐던 현상입니다. 앞으로 계속 오를까요? 두고 볼 일이지만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잘해서 반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경제 위기를 넘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연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위기 극복에는 대통령의 리더십, 국민의 신뢰, 안정적인 정치 지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두차례의 경제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진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기업, 금융, 공공, 노동 분야 개혁에 나섰고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취임 100일 한국갤럽의 국정 지지율이 62%였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초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국정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2008년 4·9 총선 압승으로 국회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금융위기 극복에 필요한 입법과 예산을 국회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금융위기를 넘긴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균형 재정을 선언했습니다. 국정 지지율 하락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재정 건전화를 결정한 것입니다. 기획재정부는 2012년, 2013년도 예산안을 연속하여 긴축 기조로 편성했고, 국회는 긴축 예산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여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국회 절대다수 의석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인 자신과 대통령실, 행정부가 열심히 일하면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습니다.
보수 신문 논객 중에는 대통령이 정치에서 손 떼고 경제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처방입니다. 지금은 통치의 시대가 아닙니다. 박정희·전두환의 시대가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통치가 아니라 정치입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한없이 자세를 낮춰야 합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9월29일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했습니다. 그날 오후 통과된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에 파묻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정진석 위원장 연설에 윤석열 대통령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정권은 바꿔주셨지만, 국회는 앞으로도 2년 가까이 극단적 여소야대 상황이 유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야당과의 협치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존경하는 김진표 국회의장님께서 지난 8월19일 윤석열 대통령 초청 만찬에서 국회 중진협의회 구성을 제안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이 협의체를 구성해서 여야가 머리를 맞대기를 바랍니다. 아직 시동을 걸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이재명 대표님께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제안하신 개헌과 선거법 개정, 국회 특권 내려놓기 등도 이 협의체를 통해서 충분히 심도 있는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윤석열 대통령께서는 국회가 국정의 중심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의장단 만찬을 통해 이러한 뜻을 밝혔습니다. 한남동 공관이 문을 열면 여야 의원들과 수시로 만나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식사도 나누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 대표가 언제든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담의 형식도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협치만 제대로 될 수 있다면 저는 여당 대표 패싱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9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대표 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진석 위원장의 제안이 매우 타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야당 대표와의 회담은 물론이고 여야 중진 협의체 구성과 개헌, 선거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사람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아니라 바로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8월19일 국회 의장단과 한 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개헌에 대해 “여야가 합의하면 내 임기를 1년 정도 줄이는 것이 뭐 어렵겠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선거법·정당법도 개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개헌과 정치관계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 같지만, ‘남의 일’로 여기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개헌과 정치관계법 개정은 여야에 맡겨두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대통령 임기가 막 시작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제에서는 정책 사안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겨야 제대로 돌아갑니다. 문재인 대통령 때의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진석 위원장이 제안한 여야 민생경제협의체 구성도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야 합니다. 이재명 대표를 만나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 정기 국회에서 필요한 법안과 예산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킬 수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을 많이 만들어내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정책이 곧 정치입니다.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정치인입니다. 제발 좀 정치를 하시기 바랍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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