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한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주먹 인사를 나누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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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선거로 밤낮을 지새우는 나라입니다. 큰 선거를 치르지 않는 해가 별로 없습니다.
2023년은 모처럼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해입니다. 4월5일 재·보궐선거가 있지만,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전북 전주을 국회의원, 울산시 교육감, 광역의원 1명, 기초의원 3명을 다시 뽑아야 합니다.
이 정도면 정치적으로 조용한 한해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전국 선거가 있는 해보다 오히려 더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국 선거 없어도 뜨거울 2023년
전국 선거가 없었던 2019년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4·3 보궐선거는 국회의원 2석(경남 창원시 성산구, 경남 통영시·고성군)과 기초의원 3석으로 규모가 작았습니다. 그런데도 2019년은 무척 소란스러운 한해였습니다.
2019년 4월22일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4당 원내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제도 개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 대상 안건 지정)에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나섰습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의 법안 처리 과정에서 의원들의 몸싸움으로 난장판이 됐습니다. 2012년에 ‘동물국회’를 막기 위해 도입한 국회선진화법은 무력화됐습니다.
장외투쟁도 벌어졌습니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끄는 자유한국당은 당원들을 동원해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청와대로 행진했습니다.
2019년 12월27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 12월30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법안, 2020년 1월13일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검찰청법 개정안이 차례차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원 내외에서 벌어진 여야 전면 투쟁의 상처는 깊게 남았습니다.
여기에 2019년 8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조국 사태’가 여야 대결을 격화시켰습니다. 자유한국당과 보수 성향 단체들은 광화문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규탄 집회를 벌였습니다.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 때 입을 닫고 집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종의 복수 심리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광화문에서는 “이건 나라냐”, “내로남불”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는 “검찰개혁” “윤석열 퇴진”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민주당 지지층은 분열했습니다. 정의당도 타격을 받았습니다.
2019년 10월 3일 오후 서울 시청 방향에서 바라본 광화문광장 주변이 자유한국당, 범보수단체 회원, 기독교 단체 회원 등이 각각 개최한 여러 건의 집회로 가득 차 있다. 공동취재사진
결국 2019년 내내 여야는 전국 선거가 있는 해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두가지 근본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2016~2017년 촛불집회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 2017년 5·9 대선의 후유증이었습니다. 둘째, 2020년 4·15 총선 전초전이었습니다.
격렬했던 2019년 데자뷔 예고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2023년에도 2019년의 데자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가지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대선 연장전입니다. 2022년 3월9일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0.73%포인트 근소한 차로 패배한 이재명 후보는 6월1일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8월28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77.77%의 압도적 득표율로 대표가 됐습니다. 이재명 대표는 “사즉생의 각오로 강한 야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대선 패배자가 곧바로 여소야대 정국의 야당 대표가 돼서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검찰, 경찰, 감사원, 국정원 등이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문재인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 인사들에게 가혹한 칼질을 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고 주장하지만, 야당 탄압 성격이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둘째, 총선 전초전입니다. 3·9 대선과 6·1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힘은 “2024년 총선에서 승리해야 정권교체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지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7일 국무회의에서 북한 무인기 침투에 대해 “지난 2017년부터 전혀 이런 드론에 대한 대응 노력과 훈련, 전력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고 훈련이 아주 전무했다”며 “북한의 선의와 군사 합의에만 의존한 대북정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 국민들께서 잘 보셨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0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한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다수 의석을 앞세운 야당의 발목잡기로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와 투자 확대를 위한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가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대통령이 ‘야당의 발목잡기’라는 자극적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사건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변명인 동시에 2024년 총선에서 야당을 심판해달라는 선거 운동입니다. 2023년에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부 핵심 참모들을 대거 사면·복권한 것도 이른바 보수 세력을 총동원해서 총선에서 승리하겠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각계 의견을 수렴해서 신중하게 사면 대상과 범위를 결정했다. 이번 사면을 통해 국력을 하나로 모아나가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보수 세력의 의견을 수렴했고, 보수 세력의 힘을 하나로 모아나가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는 말과 같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12월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 도착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물연대 파업을 힘으로 굴복시킨 뒤 노골적으로 반노동 정책을 밀어붙이고, 느닷없이 국고 보조금을 받는 비영리 민간단체를 대상으로 전면적인 자체 감사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대한민국을 보수와 진보로 갈라쳐서 보수가 승리하도록 하겠다는 선거 전술입니다.
대화·타협은 기적 같은 기대일까
‘대선 연장전과 총선 전초전’으로 압축할 수 있는 2023년 정국의 관찰 지점을 몇군데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1월22일 설 전후로 예상되는 개각입니다. 개각 폭과 대상이 중요한데, 아무래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교체 여부가 관심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민 장관을 교체하면 10·29 이태원 참사로 끓어오르는 민심을 어쨌든 수용하는 결과가 됩니다. 만약 교체하지 않으면 민심 및 국회와 맞서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경우 민주당은 이상민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를 추진할 것입니다. 정국은 극한 대치 상황으로 한발짝 더 깊숙하게 빠져들게 됩니다.
둘째, 3월8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입니다. 언론에서는 누가 대표가 되는지 관심을 보이지만, 사실은 누가 되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국민의힘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윤심’이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새 대표를 통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2024년 4·10 총선에 대거 공천할 것입니다. 국민의힘이 지난 29일 당원협의회 조직위원장에 친윤석열 인사들을 대거 임명한 것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피가 튀는 ‘공천 대학살’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친윤 세력과 비윤 세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결국 친윤 세력이 이길 것입니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 때도 그랬고, 박근혜 대통령 때도 그랬습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유승민 전 의원이 대표가 되면 전혀 다른 장면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국민의힘은 개혁 보수로 진화할 기회를 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2년차에 레임덕을 맞게 됩니다.
셋째,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거취입니다. 지금 민주당 안에 이재명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는 거의 없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공세에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적과 교전 중에는 내부 총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 중에서 2024년 4·10 총선을 이재명 대표 체제로 치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언제 어떤 모양새로 이재명 대표가 명예롭게 물러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물러난다면 민주당이 본격적인 총선 체제를 갖추는 것은 그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선거법 개정 변수가 있습니다. 최근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여야 의원 49명이 참여 중인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이 1월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서명에 나설 계획입니다. 청년 정치인 10명으로 구성된 ‘정치개혁 2050’도 소선거구제 폐지와 중대선거구제 실시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 정치 원로들과 전문가들도 1월부터 승자독식 소선거구제 폐지를 본격적으로 요구할 예정입니다.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그리고 여야 현역 국회의원들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아직은 현행 제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갑자기 이뤄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정치 자체가 역동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2023년에는 정치개혁이 이뤄져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시작되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