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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빌딩 숲에 학원 간판들이 빼곡하다. 국어·영어·수학·사회탐구·과학탐구 같은 보습학원 간판들. 거기에 보컬·기타·피아노·글쓰기·필라테스·태권도·테니스·일러스트레이션 학원까지, 시간과 자금의 여유만 있다면 배움을 청해 볼 분야와 장소들이 즐비하다. 건물 숲을 지나 마주치는, 구민회관에도 문화센터가 있다. 여기에는 수영과 배드민턴, 탁구와 요가 같은 체육 프로그램부터 다양한 인문학과 예술 강좌들을 들을 수 있다. 버스로 두어 정거장 나가서 오거리까지 나서면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자리잡은 문화센터를 만난다. 재테크부터 패션까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수업이 한가득 있다.
우리나라의 유난한 교육열 때문에, 입시학원들의 성세는 오래전부터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2000년대 초입에도 일반인들을 위한 교육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즈음이던 2007년 ‘문지문화원 사이’가 창립됐고 난 기획실장으로 참여해 운영을 맡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한 기초 교양강좌와 음악·미술·문학을 포함한 창작 강좌와 워크숍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만 유난했던 문·이과 경계에 서 있는 강의들이 많아서 인기가 있었다. 대학에서 아직 제공하지 않았던, 기술을 예술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강좌를 만들었다. 여기서 만들어진 결과물들로 전시·공연도 했고, 이곳에서 공부의 방향을 잡아서 교수가 된 수강생도 있다. 여기서 시작한 작업이 이어져 예술가로 이름을 얻은 작가도 여럿 있다. 우리가 처음 개발했던 프로그램들이 이젠 대학에서 정규 과정으로 편성돼 많은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학자나 예술가로 성장한 수강생들이 아니다. 당시에 ‘사이’는 직장인들이 어렵게 짬을 내서 오는 공간이었다. 시, 소설, 시나리오, 희곡과 같은 창작 강좌들을 통해서 등단하고 싶은 꿈을 꾸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강의들의 목표가 전업작가를 배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교양 강좌에서 미래의 전공을 찾은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학자를 업으로 삼을 사람들을 키우는 과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엉뚱한 효과를 기대했다. 자신의 영역에서는 전문가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아마추어인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이 가장 흥미로웠다. 그들은 배우면서 살아갈 기운을 얻기도 하고, 새로운 영감을 챙기기도 했다.
사무실 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와서 깜짝 놀라게 했던 사람들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한 교수는 시나리오 창작 수업을 들었다. 수강생들과 함께 합평도 하고 이어진 술자리에서 토론도 하면서 열정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칼럼계의 아이돌’로 불리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는 데 그 시절의 수업들이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유수의 문학상을 섭렵한 소설가가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수업에 제법 긴 시간을 할애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에스에프가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시대에, 그리고 기후변화와 인공지능 등으로 소설 쓰기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절에, 나는 그가 소설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얻었을 것이라 믿는다.
만화로 구현된 ‘도토리 문화센터’는 현실에서 내가 운영하던 공간과는 다르지만, 또 비슷한 곳이기도 하다. 우선 위치. ‘사이’는 서울 신촌과 홍대 사이에 있었다. 주변이지만, 중심과 중심 사이라서 중심에서 아주 멀지 않아 애매한 곳. 어차피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워 적당한 임대료로 물색했지만, 수강생들이 찾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기를 바랐다.
‘도토리’가 ‘다람구 토리1동’에 자리잡은 것도 저렴한 임대료가 한몫했을 것이다. 이 자리는 공동소유권자가 500명으로 쪼개져 있다. 길이 연결돼 있지 않아 개발이 어려운데, 1990년대 기획부동산이 거짓으로 사람들을 모아 돈을 챙겼다. 지분을 가진 사람들은 가치가 없는 땅을 비싸게 샀고, 다람시에서 문화센터를 건립하려고 임대하기 전까지는 버려진 땅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뒤 상황이 확 바뀌었다. ‘도토리’를 허물고 쇼핑센터를 짓고 싶어 하는 유니버스그룹의 유리만 사장은 침을 질질 흘린다. “아이러니해. 시에서 가장 비싼 땅 위에 모여서 가장 돈이 안 되는 걸 만들어 내고 있잖아. 이 땅으로 말할 것 같으면, 2천세대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가 두 곳. 추정 유동인구는 시간당 3천여명. 3년 안으로 고속철도 착공 예정. 강남까지 10분 내로 진입 가능한 터널 공사 계획 착수 중. 풍수지리의 명당인데.”
문제는 지분을 넘기지 않고 있는 4명, 정중순(68), 지옥길(76), 모미란(50), 그리고 송수지(59). ‘도토리’는 젊은 회원들을 중심으로 운영했던 ‘사이’와는 달리 회원들 평균연령이 70살이다. 여기에 유리만은 유니버스그룹의 유마트 총괄사업부장 고두리와 사장실 직속 비서 오소운을 잠입시킨다. 맨투맨으로 공략해 이들의 지분을 사들이려는 속셈. 사군자 교실에 등록한 고두리는 정중순의 사연을 파고든다. 수예 교실에 등록한 오소운은 지옥길 담당이다. 1권은 주로 정중순의 이야기.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의사로 순탄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부모님의 편애에 마음고생, 몸 고생이 심했다. 사군자 교실 이강주(82) 선생님과의 인연도 드러난다. 정중순은 선생님이 계속 강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지키고 싶은데 고두리는 가차 없이 민원을 넣어 이강주 선생을 사직하게 만드는 작전을 구사한다. 과연 정중순은 소유권을 내놓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다음에 나올 2권이 몹시 기다려진다.
짐작건대 고두리 부장이 도토리 문화센터에서 배운, 사소한 취미생활이 그를 변화시키겠지. “취미생활이 업무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양초 만들고 나면 일이 알아서 짠~ 하고 해결돼 있습니까? 일이 주는 스트레스는 일을 끝내야지 사라지는 겁니다.”
재미없는 ‘고 부장님’이 휘두르려던 칼날은 ‘도토리’의 촘촘한 관계들에 잡혀서 무뎌지겠지. 어떤 관계들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을까? 고두리는 무엇 때문에 경제적 이해에 반하는 일을 하게 될까? 침 흘리던 사장에게 어떻게 한 방을 먹일까? 상상만으로도 손에 땀이 난다. 작가 양반, 설마, 번쩍번쩍한 쇼핑센터에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손잡고 선물 사는 장면으로 끝내지는 않겠죠? ‘사이’도 ‘도토리’도 “각자의 생활과 싸우다가” 잠시 들러, 삶에 웃음 한 모금 적시고 가던 소중한 곳. 지킬 수 있다면 지키고 싶다.
만화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