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 속 캐릭터 ‘곽철용’을 맡은 배우 김응수씨의 인기 대사를 활용한 햄버거 광고. 버거킹 유튜브 채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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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더블로 가!”
한때 온라인에서 유행한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이미지나 짦은 영상과 글)입니다. 영화 <타짜> 속 캐릭터 ‘곽철용(배우 김응수)’이 도박판에서 한 대사로, ‘잃은 건 묻어 두고 판을 두배로 키운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최근 윤석열 정부 부처 장관들이 이 밈을 다시 소환하는 것만 같습니다. 지난 6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각각 “장관직을 걸겠다”고 했습니다. 부처 정책과 관련돼 의혹이 제기되고 논란이 일자 이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야당의 공세가 지나치더라도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사실관계를 차분히 설명해야 할 장관들이 ‘직을 걸겠다’고 해서 오히려 ‘판’을 키우는 모양새입니다. 야당은 “국가 살림과 국민의 삶은 도박의 대상이 아니다”고 더 반발하고 있습니다.
박민식 보훈부장관이 5일 오후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열린 ‘백선엽 대장 동상 제막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백선엽 장군에 ‘직’을 건 박민식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6일 <시비에스>(CBS) 라디오 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 “가당치도 않은 친일파 프레임으로 (백 장군을) 그렇게 공격하는 건 옳지 않다”며
“이분은 친일파가 아니다. 제 (장관)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날 박장관이 백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를 삭제하겠다고 밝힌 뒤 야당과 시민사회가 반발하자 한 말입니다.
이는 백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판단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위원회는 법에 근거해 만들어진 대통령 소속 정부기관입니다. 위원회가 2009년 11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5명 명단에 ‘백선엽’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백 장군은 1943년 2월부터 1945년까지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는데, 일어판 회고록에서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라며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박 장관은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라고 지금 거기 위원회에서 규정을 해 놨지 않냐? 그런데 저는 제가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이분은 친일파가 아니다” “법적 근거 없이 그냥 그 당시에 정치적 환경 때문에 그런 조치를 했다는 강한 의심을 갖고 있다” 등 자신의 ‘소신’을 가감없이 드러냈습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토교통위원회 실무 당정협의회에서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직 걸겠다” 두번째…원희룡 장관
“제가 김건희 여사 (일가가 소유한) 땅이 거기(서울∼양평 고속도로 종점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이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인지하는 게 있었다고 한다면 (중략)
저는 장관직을 걸 뿐만 아니라 정치생명을 걸겠습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6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일가 특혜 의혹이 불거진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밝히며 한 말입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서울∼양평 고속도로는 애초 양평군 양서면을 종점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는데 윤석열 정부 들어 김 여사 일가가 땅을 소유한 강상면 근처로 종점이 변경됐다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7년째 추진해온 1조7천여억원 규모의 국책 사업을 하루아침에 백지화하겠다는 ‘선언’에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 예정지 주민들은 반발하고 있습니다. 원 장관의 ‘돌발 발언’에 여당 내부에서도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또, 지난해 10월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준호 민주당 의원이 고속도로 논란과 별개로 김 여사 일가가 보유한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 일대 토지에 대해 질의를 했고 원 장관은 “확인해 보겠다”고 답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민주당은 적어도 원 장관이 양평군 강상면 일대에 김 여사 일가가 소유한 땅이 있다고 인지하고 있었다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원 장관은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있던 ‘토지형질변경’ 논의는 대안 노선(고속도로)과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다”며 ‘가짜뉴스’라고 반박했습니다.
한편, 원 장관이 ‘직을 걸겠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정부의 1기신도시 재정비 ‘공약 파기’ 논란이 불거진 지난 8월23일 원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국토부로 인해 1기신도시 재정비 일정이 지연되거나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장관직을 걸고 공개적으로 약속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일가가 소유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병산리 땅 근처 88번 지방도로. 강창광 선임기자
■ “국민 삶이 도박인가”
‘직을 걸겠다’고 한 건 박민식 장관, 원희룡 장관이 처음은 아닙니다. 앞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청담동 술자리설’을 제기하는 김의겸 민주당 의원에게 “제가 거기에 있었다는 근거를 제시하라. 저는 직을 포함해서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거시겠냐”고 받아친 적이 있습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소시에테제네랄(SG)증권발 주가조작 사태가 커지자 “시장 교란 세력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고 보면 되겠다. 과하게 말씀드리면 거취를 걸다시피 한 그런 책임감을 갖고 올 한해 중점 정책사항으로 추진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관이 부처 정책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야당의 의혹 제기가 과도하다고 느껴서 ‘직을 걸겠다’는 반응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당이나 언론, 시민사회의 의혹 제기를 봉쇄하는데 엄포를 놓으려 ‘직을 걸겠다’ 한 것이라면, 장관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당장 야당은 윤석열 정부 장관들을 향해 “현 정부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도박을 좋아하는 것 같다. 자꾸 장관직이니 뭐니를 걸겠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데 공직자로서 해야 할 일은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안 하면 되는 것이지 국민의 삶이나 국가의 미래를 놓고 자꾸 도박하자 이런 소리 안 하면 좋겠다”(이재명 민주당 대표) “왜 이렇게 뭘 걸고, 마시는 극단적인 정치를 하는 분들이 많은지 모르겠다”(김한규 민주당 원내대변인) 등 냉소적 반응을 보이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관들의 행보를 보는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시비에스>(CBS) 라디오 프로그램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선거운동하려고”라며 박민식·원희룡 장관의 행보가 내년 총선 때문인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